여현성 목사 [은광교회]
춘분에 내린 봄비로 촉촉이 젖은 부평가족공원 공동묘지 주변은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인적도 드문 오후시간에 혼자서 무덤 주변을 걸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순절기간 죽음에 대한 주일 설교를 준비하며 죽음의 내용이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답답함을 느껴 단숨에 20분 남짓 거리에 위치한 공동묘지로 차를 몰아야 했습니다. 편한 책상에서 만들어지는 설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냥 외워서 외치는 웅변이 아니라 죽음의 냄새를 맡고, 죽은 이들의 자취를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친구가 잠든 납골당과 40년 전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의 납골당도 지나갑니다. 늦은 시간 화장터를 향해 달려온 운구차량도 마주합니다.
봉분이 있는 무덤들을 바라보니 고요하고 적막 했습니다. 그때 나의 시선을 끌었던 물체가 있었습니다. 사연이 있을 무덤 앞에 세워진 대리석 묘비의 묘비명이었습니다. 잠시 묘비명을 살펴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나는 묘비명에 뭐라 적을 것인가? 아니 내가 적지는 못하지만 뭐라 적어 달라고 말할까? 죽음의 감성과 함께 한쪽 가슴에 묘비명에 대한 숙제를 안고 서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사성어가 떠오릅니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지구별 소풍 끝나기 전 나의 마지막 기록이 묘비명입니다. 100년 여행객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가 묘비명입니다.
미국이 크게 자랑스러워하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묘비명은 작가이기에 대단할 것이라 생각이 들었는데 작가답지 않게 하나의 문장입니다.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영국의 극작가이자 비평가, 소설가로 역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묘비명은 익살스러우면서도 엉뚱한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happen)”. 코미디언 김미화가 미리 지어놓은 자신의 묘비명은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합니다. 바보천사라고 불린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의 묘비명에는 소박한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다 간사람.”
우리는 죽음에 대한 학습을 TV 뉴스나 영화, 미디어를 통해서 보고 배우게 됩니다. 사건, 사고를 통해 막연하게 당하는 죽음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죽으면 어떡하나?” 겁을 먹습니다.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하여 무서움을 갖게 되고 죽음 자체를 즉흥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여기게 됨으로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피하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가장 명백한 진실은 생명 있는 것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히브리서 9장 2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오늘날 현대인의 관심이 웰빙(well-being)에서 웰다잉(well-dying)으로, 웰다잉에서 웰에이징(well-aging)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관심은 웰빙과 웰다잉, 그리고 웰에이징의 수준을 넘어 웰리빙(well-leaving)이어야 합니다.
웰다잉(잘 죽는 것)이 아니라 천국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로서 잘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적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종의 영성을 통해 잘 살고, 잘 떠나는 것이 우리의 미션입니다. 100년 여행객으로 지구별 떠나는 날에 난 웃고 세상 사람들은 울어야 하는 인생을 살아보기 원합니다. 날마다 죽음을 기억하는 메멘토모리(Memento mori)를 외치며 신이 나에게 선물해 주신 오늘을 즐기는 카르페디엠(Carpe diem)의 삶을 살아가면 참 좋겠습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떠날 것처럼 사랑하며 살다보면 떠난 자와 남은 자들의 대화인 묘비명에 멋진 인생을 갈무리한 글귀가 새겨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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