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호 목사 [새로운제자교회 / 시흥중앙전도지방회 부회장]
여러분은 사람 보는 눈 좀 있으십니까? 이 사람이 진짜 괜찮은 사람인지, 또는 누가 진짜 목사인지 가짜 목사인지는 볼 줄 아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 좋은 모델과 샘플이 될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을 읽으시다가, 질문이 생기지요? “왜 하필 엘리야는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도록 기도했을까?”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게 되면 “모두가 힘들고 자신도 힘이 들텐데, 왜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길 기도했을까?”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은 비와 이슬이 아닌, ‘홍수’ 또는 ‘유황불’입니다.
홍수나 유황불이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알았을 텐데, 비와 이슬을 금한 이유는 ‘베니게 출신‘의 ‘아합의 부인 이세벨’ 때문입니다. 그녀가 ‘아합’에게 시집올 때,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데리고 왔고, 이스라엘 전역은 이것들이 풍요를 가져다주는 줄 알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것에 분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경배하는 것에 대해서 분한 것입니다. 울분을 터뜨린 것입니다.
1.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숭배하는 것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거짓과 악한 영과 타협하지 않고, 분개하고, 싸우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이단의 교주들, 또는 종교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앉아서, 하나님 받으실 영광을 다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에 울분을 터뜨려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우상과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분개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2. 눈에 보이는 것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했을 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850명, 갈멜산에 올라온 자들만 450명입니다. 상대적으로 엘리야가 적고 불리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크면, 비싸면, 많으면, 좋을 것이라고 여기는 심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명품이 잘 팔리는 현상도 그런 것 아닙니까? ‘크면, 비싸면 많으면 뭔가 있겠지’ 이런 생각이 위험한 것은, 상대적으로 작으면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어떤 교회성도들이 “작은 교회 목사는 영성이 없어서 교회가 작은 거다”라고 하면서 전도하는 것을 봤습니다. 눈에 크게 보이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3. 고난을 함께 경험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그릿시냇가에서 기진합니다. ‘엘리야’는 하늘의 ‘비’와 ‘이슬’을 금하고, 가뭄이 올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혼자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경험한 것입니다. 함께 고난을 받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300’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테르모빌레 전투’를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크세르크세스 왕’의 대군과 ‘레오니다스’ 왕의 군대가 전투를 벌입니다. 길목을 막고 싸우다가 300명이 전부 전사합니다. ‘크세르크세스 왕’이 마지막 군사 한 명을 사로잡아서 “왜 그렇게 죽기까지 싸우느냐?”라고 묻자 군사가 대답합니다. “우리의 왕은 군사가 굶을 때 왕이 식사한 적이 없다. 병사들이 잠을 못 잘 때, 왕이 잠을 잔 적이 없다.”
우리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사망과 저주에 가망이 없을 때, 혼자 하늘의 영광과 찬송을 듣지 않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함께 식사하시고, 함께 잠도 주무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벌거벗김’과 ‘채찍질’과 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오늘날은 ‘종’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너무 큰 영광을 받는 것은 아닌가란 고민을 할 때가 많습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요 13:16)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게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서게 되시길 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