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는 과거에만 있어야 하는 역사의 유물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도 정확하게 그 숫자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6.25때 순교한 노형래 집사, 아버지의 영향인지 자녀들은 모두 목회의 길을 걷고 있다. 맏아들 노태철 목사(제일교회 원로목사)는 그 때 당시 9살이었기에 아버지의 기억이 희미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순교로 인하여 자손들이 복을 받고 있음에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순교자 노형래 집사의 생애
노형래는 1923년 음력 7월 27일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염천에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한성리에서 노승우 장로(한성성결교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항상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고, 그의 깊은 기도생활은 경건한 성도의 승리하는 생활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영혼을 사랑하며 열심히 전도하는 일에 또한 그러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종소리가 울리자, 전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살고 있는 집을 개방하여 한성성결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생각처럼 희망적이지를 못했다. 남북의 분단, 미군정 신탁통치, 민족의 좌우사상의 대결 등은 팽팽히 당겼다가 놓아버린 용수철처럼 무정부상태의 무질서와 혼란을 야기하였고 상황은 심히 염려스러웠다. 당시 문을 닫았던 교회의 문은 열렸지만 교역자는 없었다. 그래서 노형래는 섬기는 한성교회 외에도 주일이면 도둠, 비인, 태성, 길산 교회 등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교역자를 대신하여 사역했다.
6.25 전쟁으로 인하여 순교하게 된 노형래 집사
1950년 6.25가 터졌다. 삽시간에 공산당은 서천에도 물밀 듯 밀어닥쳤고, 노형래는 일제 압박에서 건진 교회를 또다시 무신론 공산주의자들 손에 넘겨야 할 것을 생각하니 찢어지는 듯 가슴이 아팠다. 그는 어느 날 형제같이 지내던 길산교회 최동규 전도사(서울신학대학교 전 총장 최종진 박사의 부친)를 찾아가서 “전도사님! 미친 듯 날뛰는 공산당들을 볼 때 나에게 닥쳐올 큰 고난이 예견됩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되오니 기도로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최동규 전도사와 함께 기도하고 헤어졌다.
교회에 엎드려 기도하다 예상한대로 부친과 노 집사 형제가 함께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춧가루를 탄 물주전자로 코에다 물을 붓는 고문과 공중에 매달아 놓고 짐승을 패듯이 매로 패는 등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삼부자가 각방에 분리 심문을 받는 중 오가는 길에 부친과 동생에게 귓속말로 “다 죽을 수는 없으니 모든 책임을 전부 내가 맡아 질테니 그리 알라” 말했다.
노형래는 몸서리치는 각종 고문과 취조를 당할 때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동생과 성도들의 생명을 대신해서 모든 짐을 홀로지고 아버지와 아우를 석방시키고 그는 홀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불에 타 죽는 순교의 길을 택했으니, 그 때 그의 나이 28세의 꽃다운 청춘이었다. 휴전 후 대전시의 노력으로 당시에 순국한 애국지사들의 시신을 거두어 대전시 보문산 사정공원에 애국지사 총을 건립하여 순국자들을 추모하며 기념하고 있다.
노형래 집사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고 형제처럼 지낸 옥산교회 나순하 장로(나세웅 직전 총회장의 부친)는 “노승우 장로님과 그의 아들 노형래 집사는 사가를 개방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자기 가산을 다 기울여 교회를 이룩하는 등 주님나라 위해 충성하다가 마지막 자기의 생명까지 민족제단에 바쳐 순교의 제물 되셨지요. 그 거룩한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아 후손들이 영육간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사역에 크게 쓰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라고 말한다. 순교의 희생은 후세의 하나님의 선한 열매로 아름답게 영글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