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의 이해>
성탄절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고자 한다면 추수감사절의 ‘감사’를 잘 실천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해 묻게 될 것이다.
추수감사절 때 흠뻑 간직했던 감사는 대강절로 이어져야 한다. 대강절의 초점은 ‘회개’이다. 마음의 준비 없이 주님을 맞이할 수 없고, 준비는 철저한 회개에서 시작된다. 개인적인 회개를 넘어서 교회의 회개, 사회의 회개에 까지 이르게 함이 좋겠다. 회개가 깊어지면 자연히 총체적인 구원의 ‘소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류 최고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하심에 달려있다.
성탄절은 교회력으로 볼 때 마지막 절기이지만 사실은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다. 성탄절을 시작으로 우리의 과거를 잊고 주님과 함께 새로 출발하며 신년을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년의 의미는 ‘시작’이다. 우리는 감사로부터 회개와 소망으로, 그리고 시작으로 절기를 이해하며 설교하고, 기도하면서, 목회 계획들을 세울 수 있겠다. (편집자 주)
♣ 성탄절 유감
12월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한 포털 사이트에 ‘12월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검색해보니 크리스마스가 가장 많이 그리고 연말, 선물, 망년회, 나이 먹기 싫다 등이 나온다. 언뜻 생각하면 성탄절의 의미가 아직 살아있구나 싶지만 그들이 말하는 크리스마스가 꼭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이라 할 수 없다는 게 주지할만한 사실이다. 아기 예수의 이야기는 온데간데없고 각종 광고에는 산타클로스의 웃는 얼굴과 루돌프 사슴의 빨간 코만 반짝인지 오래다. 아기 예수의 존재는 가족과 연인에게 선물할 구실일 뿐이고 어느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비 기독교인에게 성탄절은 선물의 가격이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환산되는 날이라는 점에서 밸런타인데이나 다를 바 없다.
원래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성탄목은 우리 죄를 상징하는 금단의 사과(창 3장), 사막에서 생명을 피워내는 소망의 예수를 상징하는 장미(사 35:1), 신령한 만나이신 예수를 상징하는 떡(요 6:35),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를 상징하는 촛불(요 8:12)로 장식했었다. 하지만 지금 백화점, 마트는 물론 교회에도 눈을 상징하는 솜, 산타 할아버지, 지팡이, 선물을 떠올리는 상자나 양말 등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다.
♣ 역사적 기원
고대교회는 처음에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등장한 날을 기념하는 1월 6일 주현절(主顯節)을 예수탄생 축제일로 지켰다. 그러다 주후 354년경 로마 문서는 12월 25일을 ‘유대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나신 날’이라고 기록하는데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정복되지 않는 태양’이라는 이교도의 축제일이었던 12월 25일(동지)을 기점으로 점점 낮이 길어지는 것에서 착안하여 초대교인들이 그날을 참 태양이신 예수의 탄생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적인 기원보다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성육신 사건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성탄일 결정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첫 번째 성탄절 행사는 1884년 10월 의료선교사 알렌(H. N. Allen)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한 2개월 후 정동 사택에서 첫 성탄절을 맞았는데 12월 26일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어제는 성탄절이었다. 아내는 내게 멋진 자수공단 모자와 비단 케이스에 넣은 공단 넥타이 두 개를 주었는데 모두 아내 혼자 마련한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줄 선물로 15달러짜리 멋진 실크 가운을 일본 요코하마에 주문했는데 이달 초 일어난 정변(갑신정변)때 다른 외국에서 온 많은 우편물들과 함께 소실된 것 같다.”
이렇게 선교사들의 선물교환 정도로 시작된 성탄절 행사는 1887년 9월 28일 한국최초의 장로교회(현 새문안교회), 10월 9일 한국최초의 감리교회(현 정동제일교회) 개척과 함께 마침 주일이었던 그해 12월 25일 정동감리교회 벧엘예배당에서 비로소 한국인에 의한 첫 성탄예배로 진행된다.
♣ 성경적 의미
성탄절은 본래 12월 25일 하루만 지키는 절기가 아니라 주현절(1월 6일) 전까지 12일간 지속되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탄절은 성육신의 절기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억하는 감상적인 축제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 더 큰 의미다(요 1:14). 출애굽기 33:7을 보면 하나님의 장막은 항상 진 밖에 위치했다. 그것은 범죄한 이스라엘 진중에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를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 밖에 하나님의 장막을 세우고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나아오라 한 것. 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할 때 동사 ‘거하시매(σκην?ω)’는 ‘천막을 치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이 장막을 치고 거하시듯. 그런데 진 밖이 아니라 진중에, 우리 가운데.
둘째, 성탄절은 교환의 절기다. 신성과 인성, 영원과 유한, 삶과 죽음의 교환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해결하시고 신의 성품으로 옷 입히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다. 그 결과 유한한 우리가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산다.
셋째, 성탄절은 희생의 절기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불가능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아들을 내어주는 아픔을) 실행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다는 말은 그리 낭만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 말은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번번이 당신의 ‘마음 속 십자가’를 지시는 고통을 기꺼워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그것도 모자라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겠다는 위대하지만 고통스러운 결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픔이 성탄절에 들어 있고 그 아픔 덕분에 우리에게는 감사의 절기가 된다.
마태, 누가복음 속 예수 탄생 이야기는 두 세력의 대결을 그린다. 마태는 로마가 승인한 ‘유대인의 왕’ 헤롯과 하나님이 선택한 ‘유대인의 왕’ 예수를 대립시킨다. 누가도 같은 맥락에서 로마제국과 하나님나라, 로마의 황제와 메시아 예수를 맞세운다. 마태는 헤롯의 유아살해명령과 그로인한 요셉 가족의 이집트 행, 몇 년 후 귀향이라는 여정을 통해 예수에게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모세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빛이 어둠을 밝힌다고 할 때 그 어둠은 죄악(영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탄절을 다시 맞는 교회의 역할도 영적인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 성탄절 소망
연말연시하면 떠오르는 단어들로는 설렘, 가족, 크리스마스, 좋은 사람들 등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배고픔, 외로움, 절망, 죽음을 생각한다. 주님의 생일에 죽음을 묵상한다. 보통 아이의 돌잔치에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천만년 영화가 보장된 동화 속 왕족처럼 아이도 부모도 화려한 옷을 입는다. 부모의 주머니를 털어 몇 시간의 구원을 구매하고 소비한다. 성탄절에 죽음을 말하는 건 그런 유사 구원을 거부하는 최소한의 각성 장치다. 주님의 탄생에 죽음을 생각하고 주님의 죽음에 삶을 생각한다. 죽임 당한 구세주로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아파하고 절망하는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시는 주님을 전 존재로 환영하며 감사하고 온 세상에 소개한다. 성탄절은 감사절이고 주현절(主顯節)이다.
오현철 교수(성결대학교 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