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한 목사 [포도나무교회]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온다. 일곱 교회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과 평가가 얼마나 다른지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대표적으로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계 3:17)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살았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직접 말했던 것일까? 비슷한 경우를 구약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 도다”(사 30:9-11)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말했을까?
라오디게아 교회와 이스라엘 백성은 위와 같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말한 것만 자신이 말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태와 우리의 행동의 소리를 들으시는 것이다.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와 행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어떻게 믿는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단편적인 말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와 행동을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옳은 말과 은혜로운 설교 그리고 좋은 글은 사람들의 가미를 자극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따르기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모두” 잘못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는 “상태와 행동”을 살피기 전이라면 착각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글, 설교를 보시는 것이 아니다. 또한 따르는 사람의 수와 사역이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태의 소리를 들으신다. 우리의 행동의 소리를 들으신다. 그리고 우리의 상태와 행동을 다 아신다.
한 때 국내, 국외라 할 것 없이 다니며 말씀을 전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은혜가 함께 하는 좋은 교제를 이루기도 했지만, 공허하고 텅 빈 마음의 사역자들과 성도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공허한 마음과 텅 빈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섬김은 옳은 모습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상태를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옳다고만 말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국교회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저런 원인에 관한 분석과 답이 제시되고 있지만, 우리가 먼저 점검해야할 것은 우리의 상태와 행동이다. 하나님의 평가와 인간의 평가가 분명히 다름을 인식해, 우리의 상태와 행동이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합당해야 위기의 시대에 작은 소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