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뉴 노멀
‘뉴 노멀’은 경제변화 흐름에 따른 새로운 기준을 의미하는데 뉴 노멀이 등장하면 기존의 기준은 ‘올드 노멀’이 된다. 예를 들어 중국, 한국 등 신흥국의 부상을 뉴 노멀이라 한다면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이 주도한 국제경제 질서는 올드 노멀이 되는 것으로 사실상 경제 부문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이전에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였던 현상이 점차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는 ‘클리세’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 클리세는 문학이나 영화에서 쓰는 비평 용어로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쓰여 진부한 표현, 뻔한 문구, 캐릭터 등을 지칭한다.
1996년 1월 「목회와 신학」은 멀티미디어 관련 특집을 다뤘는데 기고된 글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멀티미디어 시대를 맞는 교회의 사회적 기능,” “멀티미디어의 물결, 충격의 물결,” “멀티미디어, 목회를 세울 것인가 무너뜨릴 것인가.” 이 시기를 전후해 「기독교사상」과 「신학과 세계」,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월간목회」 등도 비슷한 관심을 보였다: “멀티미디어란 무엇인가”, 「기독교사상」(1995), “멀티미디어 시대의 교회와 목회”, 「신학과 세계」(1996), “설교, 멀티미디어 시대를 대비하자”, 「월간목회」(1997), 『크리스천, 인터넷, 멀티미디어』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1998). 멀티미디어를 교육과정 속에서 의미 있는 경험을 촉발시키는 매개체로 인식하며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기독교교육학 분야와 달리 예배학 분야 선행연구들은 예배를 위한 ‘도구’로 한정하고 부정적 영향에 대해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우리는 “멀티미디어는 멀티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사회적 강요가 된다.”고 말한 당시 박충구의 예언(?)이 현실이 된 극단적 뉴 노멀 시대를 살고 있다.
1998년 2월 숭실대 전국목회자 신학세미나가 “다가오는 21세기와 예배의 개혁: 멀티미디어 시대와 예배”라는 주제로 개최되었을 때 참석자들의 반응은 첨예하게 엇갈렸다. 이런 예배를 드려도 되는지와 어떻게 하면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2000년도 중반으로 가며 실제로 예배에 있어서 어떻게 멀티미디어를 사용할 것인지와 그것의 장단점을 조명하는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2010년도 후반에는 2000년대 중반의 논의와 유사하지만 블로그, 유튜브, 사이버 강의, 앱, 모바일 등 새로운 미디어를 추가한 연구들이 제안되었다. 우리시대 예배실 스크린은 이제 Len Wilson이 말했듯 새로운 스테인드글라스이자 십자가이고 앱 세대를 위한 성경이다.
2. 뉴 노멀 시대 설교
2010년 국민일보 조사에 따르면 목회자 10명 중 6명 이상이 한 주 평균 10회 이상 설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한국기독교 분석리포트: 2018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는 목회자의 한 주간 설교 횟수를 평균 6.7회로 보고했다. 2010년에 비해 많이 낮아진 수치이나 설교자 44.5%가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 맞춰 설교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답했다. 그러던 한국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코로나로 인해 거의 모든 교회의 대면예배가 축소되고 설교횟수도 줄었다. 소모임을 자제하고 주일 낮 한 번의 예배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제 프리코로나에는 상상도 못 했던 설교 한편에 집중할 수 있는 설교환경이 뉴 노멀로 주어졌다.
그동안 열심히 땀 흘린 수고에 대한 선물로 알고 못했던 공부도 하며 설교에 치이는 목회가 아니라 설교가 기다려지는 목회, 하나님과 말씀과 회중 앞에서 우리 설교자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깨닫고 그와 말씀과 회중 앞에 돌아가 가까이 서야한다.
1) 사라지는 세대를 향한 설교: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라
뉴 노멀 시대 교회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수적) 부흥의 시대로 갈 수도 없다. “사회의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증가하고 가나안 신자도 늘 것이다.”라는 지형은의 예측에 가슴 아픈 동의를 한다. 교회를 빠져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젊은 층이 많다. 2-30대 청년은 물론 4-50대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의 누수현상에 설교자의 책임을 제외할 수 없다.
청년문제는 높은 실업률, 저성장 고착, 경제적 불안정의 일상화로 대표되는 현 시대의 모순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를 말해야 할 주체인 청년이 사라지는 현상은 뉴 노멀 시대 핵심징표다. 그들은 철저히 고립됐고 꿈을 잃고 관계는 파탄됐다. 이런 비정상적인 청년의 모습이 정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청년의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건 과거의 전성기를 되새기는 기성세대의 목소리였다: 영화 <건축학개론>,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 KBS 예능 <불타는 청춘>, 신조어 ‘라떼는 말이야’(http://thetomorrow. jinbo.net/archives/2089). 4-50대는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허리세대다. 청년시절 대학이나 민주화과정에서 이상을 추구했던 그들은 이제 직장의 부조리, 자녀교육의 피곤함, 사회의 불안정이라는 현실 속에서 숨이 가쁘다.
현실 속에서 고민할 때 설교가 해야 할 일은 이상과 현실사이를 좁혀주는 게 아니라 믿음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이해하고 좁히도록 돕는 것이다. 세상에서 어떻게 기독교적 가치관을 토대로 명확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지 성경을 근거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설교여야 한다. 그러려면 설교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삶의 자리로 들어가야 한다.
2) 보다 큰 공동체를 향한 설교: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라
Hans Kung은 교회의 본질을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피조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한다. John Calvin은 그의 교회론을 신자의 어머니로서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설명한다. 예배, 설교, 양육, 봉사를 감당하는 교회는 존재자체가 가시적이고 유형적인 지상의 교회이지만 그 한계에 제한되지 않는다.
Jurgen Moltmann은 Kirche in der Kraft der Geistes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라는 책에서 교회의 본질을 역사 속에 있는 교회로 설명한다. Karl Rahner는 미래의 교회를 열린 교회, 사회비판의 교회로 규정한다. 교회는 태생적으로 공공성을 갖고 교회의 사역은 교회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설교의 책임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만 아니라(David Bosch) 세상을 세상답게(하나님이 창조하신대로) 하는 것이다(Stanley Hauerwas). 보다 큰 공동체로서 사회의 다양한 이슈와 영역에 대한 관심과 참여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공적 사명을 감당하도록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청사진을 제공해야 한다. 교회가 사회윤리를 가지는(to have) 게 아니라 사회윤리가 되도록(to be), 개인적 ‘형통’이 아니라 ‘더불어’라고 하는 공적교회로 회복되도록(Walter Brueggmann) 설교해야 한다. 그래서 회중으로 하여금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요 3:16)을 하셨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교회를 세우셨다. 죽을 수밖에 없고 비정상의 길을 가던 우리를 생명의 길로 돌이키시고 정상으로 받아주셨다. 우리가 그리고 교회가 뉴 노멀의 가장 좋은 예다. K-방역 이전에 G-방역이 있었다. 큰 은혜 받은 자가 작은 은혜 베푸는 일에 실패한 전철(마 18:21-35)을 밟지 말고 소년의 도시락처럼(막 5:30-44) 우리수준의 ‘내어놓음’을 실천하자고 설교하라. 공동체를 교회로만 한정하고 교회를 사회, 타종교, 자연과 구분했던 우리인식의 ‘내려놓음’을 선포하라.
Rodney Stark, John Piper, 이상규, 임성빈, 이도영 등이 강조하듯 안전지향의 시대 ‘위험을 무릅쓰는 자’로 살아가도록 도전하라. 기원 후 165년과 251년 지금처럼 역병이 로마제국을 강타했을 때, 희생적인 구호활동을 감당할 종교단체나 사회단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로마제국의 3분의 1이 질병으로 죽어가는 동안 의사들은 숨어버리고 유증상자는 집 밖에 버려지고 사제들은 도망갈 때 그리스도인들은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서 병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을 보살폈다. 교회는 예방주사를 맞았다.
‘예수의 흔적’(갈 6:17)이 그 증거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이들이 꺼려하고 그런 욕망 위에 구축된 문화가 위험하게 여기는 일을 ‘예흔’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이 감당하도록 설교하자.
3) 규모와 형편이 비슷한 교회를 향한 설교: 연대하라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전개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연대(連帶)다. 연대는 연합과 동의어로 쓰일 수 있으나 사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연합이 단순히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 서로 합동하거나 또는 합동하여 하나의 조직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된다면 연대는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여럿이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동아국어대사전).
공신력을 상실한 한기총 등에 의해 주도되는 과거의 연합운동방식이 아니라 규모와 형편이 비슷한 교회들이 ‘책임을 함께 지고 역할을 나눠 하는’ 연대가 더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다. 1,000명 이상의 교인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5만 4천여 한국교회의 불과 1%밖에 되지 않고 100명 이하의 교인을 가진 교회가 전체의 85%나 되는 현실 속에서 지역마다 작은 교회들이 연대하여 같은 교회 교인이 아님에도 서로 하나로 연결될 때 코로나와 같은 총체적 문제에 공동 대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교회발(made in church) ‘뉴 노멀’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 앞에 연대(stand with 시133)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마 5:23-24; 6:12) 세상을 품을 것인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희도 다 하나가 되길 원한다.”(요 17:11,21)는 주님의 기도처럼 한국교회가 먼저 하나 되고 그 하나 됨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요 17:23) 그의 영광을 보고(24), 그를 알도록(25) 교회들을 향해 설교해야 한다.
작은 한 교회가 모든 것을 하는 백화점식 목회나 모든 것을 주겠다는 종합선물세트식 목회,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우리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을 공유하고 다른 교회, 지역단체, 전문가그룹이 갖고 있는 것(공간, 콘텐츠, 재능, 기술, 프로그램 등)을 연계해 더 이상 혼자 가지 말고 함께 가도록 동역자들을 향해 설교하자.
4) 우리 자신을 향한 설교: 토대는 안전한지 물으라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하나님의 경고나 진노’라는 해석이 자주 등장한다. 2004년 인도네시아와 인도에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는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2011년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그 해석의 진원지였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기독교만의 것이 아니다. 이슬람교는 물론 동양의 성리학이나 서양의 스토아학파처럼 하늘을 도덕적 기준으로 이해하는 철학도 동일한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3장은 건물이 붕괴되어 여러 사람이 죽은 사건을 보도하며 “이 일이 죽은 자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에 일어난 줄로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런 일을 만날 때 남들을 정죄하기보다 우리 스스로를 살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사실 인류는 어스 시뮬레이터(earth simulator), 창세기급속강화프로젝트(GRIP) 등 슈퍼컴퓨터를 통해 자연재해를 예측하고 대응해왔다. 일본은 이와 관련해 최고의 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나라였다. 하지만 “오늘의 재앙은 우리 삶의 토대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깨닫게 한다.”는 Barack Obama 전 미국 대통령의 말에서 우리의 한계를 절감한다.
지금은 이 세상이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인류 모두가 깊이 인정하는 시기다. 이 시점 스스로에게 질문하도록 설교해야 한다: 어떤 토대에 서 있는지, 안전한 줄 알았는데 깨지기 쉬운 불안정한 것인지. 안전한 믿음 위에 서 있다면 그 믿음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 믿음이 유효한지.
오현철 교수 [성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