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15 해방까지 우리 민족은 36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아래 식민지 압제를 당하였다. 일제는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운 이후, 이 땅을 내선일체를 통한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삼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한국교회에 까지 강요하였다. 1938년에 들어와 신사의 망령 앞에 감리교가 자진 굴복한 것에 이어서 장로교가 교단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성결교도 별다른 저항 없이 신사참배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이런 광란과 질곡의 역사 중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이가 있으니 그는 가시밭의 백합화같은 삶을 살다간 박봉진 목사이다.
1. 출생과 입교(入敎)
박봉진(朴鳳鎭)은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로 들어와 교파형 선교를 통해 복음의 기초를 놓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1890년 경기도 평택군 청북면 어소리에 있는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다부진 그는 도회지가 아닌 시골에서 성장하며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17세가 되던 어느 날 그는 부자가 되는 사업가의 꿈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수원으로 갔다. 시골집을 떠났으나 특별히 자신을 반겨주는 이가 없어 거리를 헤매며 방황하던 중에 수원교회(현 종로감리교회) 앞 청년들에게 전도를 받고 바로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수원교회에 입교하여 교회를 다니며 금은방 견습공이 되어 세공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얼마나 신앙생활에 열심을 보였는지 교회 나간 지 3년 만에 집사가 되었다. 말씀을 통해 은혜를 경험할수록 그는 고향에 교회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결국 실행으로 옮겨져 25살이 되었을 때 그의 발걸음을 고향으로 돌리게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 온 그는 그동안 배웠던 기술을 활용하여 금은방을 개업하고, 이내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평택성결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자기 재산을 헌납하여 교회 건물을 완공하였다(1923년).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성품이 곧고 강직한 그는 1919년 나라를 잃은 설움에 온 민족이 한 마음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경에 잡혀서 투옥이 되기도 하였다.
2. 소명과 헌신
그는 사업가로서 역량도 뛰어나 40세가 되기 전에 오늘날 일종의 전문 백화점과 같은 매장을 수원에 개설하고 금은 귀금속 판매와 세공, 화장품, 모자 등 악세사리를 판매하면서 평택, 천안 까지 7개 매장을 확장하며 재산을 많이 모았다. 사업이 흥왕할수록 그의 신앙도 뜨거워지고 교회에 대한 헌신도 식을 줄 몰랐다. 그러나 불경기를 만나 경기가 침체되고 사업이 진척되지 않는 가운데 그는 깊은 기도 가운데 사업을 접고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로 결심하였다. 1932년 그의 나이 42살 박봉진은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졸업을 하기도 전인 재학 중에 그는 불타는 구령열에 교회를 개척하였고 3년 후에 졸업하였다. 1935년에 여주교회에 부임하였고, 이후 1937년 이천성결교회를 맡다가 1941년 5월 철원성결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3.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앞서 언급한대로 일제는 1925년 조선신궁을 남산에 설립한 뒤 1930년대로 들어와 신사참배를 학교에서부터 실행하게 하더니 한국교회에 까지 강요하다가 1938년에 와서는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점차 한국교회를 강제로 통합하여 소위 일제의 어용기관에 불과한 ‘조선기독교혁신교단’으로 개편하였고, 성경과 찬송가 일부도 삭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1943년 5월 24일 재림 교리를 강조하는 성결교회는 일제 국체와 맞지 않는다 하여 전국의 성결교회 교역자, 장로, 집사들을 검속하였다. 이때에 철원성결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박봉진 목사도 5월 27일 일제 고등계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투옥되었다. 일경은 잡혀 온 박봉진 목사를 심문하면서 감언이설로 회유도 하고 위협도 하면서 신사참배를 수용하도록 강요하였지만 거부하였다. “신사참배는 하나님 앞에 우상숭배의 죄이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참 신이 없다고 믿는다”고 말하며 끝까지 거부하는 박 목사에게 주리를 틀고 천장에 매달아 장작 패듯 매로 때리며 정신을 잃을 때까지 고문을 하였다. 박 목사는 피나는 모진 고문들을 3개월 이상 받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 나갔다. 결국 일경은 인사불성이 되어 다 죽게 된 박봉진 목사를 방면하였고 출소한지 5일 만에 박봉진 목사는 소천하였다. 그 때가 1943년 8월 15일로 그토록 애타게 기도하며 사모하던 해방이 되기 바로 이년 전이었다.
닫는 말
성결교인들도 대부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교한 목사를 말하면 장로교 산정현교회의 목사였던 주기철 목사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매 맞아 죽어가면서도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여 순교의 잔을 마신 목회자가 있다. 그는 한국성결교회 역사에서 별과 같이 찬란히 빛나는 철원성결교회 박봉진 목사이다.
정상운 목사
본지 논설위원.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