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봄. 결혼 비용을 모두 현금화하여 개척교회를 세우고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그때, 교단 총무 양광석 목사가 찾아와 군종장교(군목)로 나를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이미 병장 만기 전역을 했고, 교회도 이제 막 자립 단계에 들어섰기에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일주일간 수원 칠보산기도원에 들어가 금식하며 기도하던 금요일 새벽, 수많은 병사들이 군모를 벗어 흔들며 “오라!” 외치는 환상을 보았다.
이듬해 초봄 나는 광주 육군보병학교로 입교했다. 첫 부임지에서부터 이곳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자리임을 확신했다. ‘진중의 메아리’라는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만들어 기타를 메고 오토바이에 올라 내무반과 훈련장, 고지 초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1년 후 여단장을 비롯한 200여 명의 세례식을 집례하는 열매를 보았다.
그렇게 13년을 보낸 후 논산 육군 제2훈련소로 발령받았다. 2,000명을 수용하는 웅장한 연무대교회 강단에 처음 섰을 때, 모인 인원은 겨우 400여 명. 하나님께도 교계에도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이 텅 빈 교회를 채우라’는 사명감이 불타올랐지만, 훈련병에게 일요일은 유일한 휴식일이었기에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기도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확신으로 기독장교회장 정 대령과 함께 40일 작정 기도회를 시작했다. 매일 새벽 30여 명이 부르짖고, 금요일 밤이면 영암산기도원에서 밤을 새웠다. 기도 끝에 얻은 지혜는 일요일 종교행사를 정식 ‘종교 교육’으로 개편해 모든 훈련병이 종교를 하나씩 선택해 참여하게 하는 것이었다.
‘훈련병 전원 신자화 계획’이라는 문서를 만들었으나, 결재권자인 훈련소장이 부담을 느껴 승인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방법은 하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먼저 얻는 것이었다.
말단 군목이 직접 총장실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던 심정으로 비서실장에게 “총장님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영감을 받았다”고 청했다. 뜻밖에도 총장은 반갑게 맞아주었고, 계획을 들은 후 벌떡 일어나 손을 잡으며 “소신껏 하십시오, 힘껏 돕겠습니다”했다.
이튿날 육군교육사령관에게도 같은 보고를 올려 격려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훈련소장은 결재 서류를 읽고는 미소를 거두고 창가에 서서 “훈련병들이 지금도 휴식이 부족한데…” 하며 망설였다. 나는 히든카드를 꺼냈다. “참모총장님과 교육사령관님께 이미 후원 확답을 받았습니다.” 소장은 허탈하게 웃으며 “목사님은 정말 못 말리겠습니다. 한번 해봅시다!”하고 결재했다.
그 주일, 교회 앞마당에 군화 소리가 울리며 훈련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 2부 예배 참석 인원만 7,000명이 넘어 통로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지난주 400명이던 교회에 일주일 만에 7,000명이 모인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세례 지원서를 받으니 한 달 만에 3,000명을 넘었고, 이후 매달 대규모 합동 세례식이 논산훈련소의 전통이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국민일보가 취재해 붙인 제목이 ‘한국판 베드로’였다. 성경 속 베드로가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을 회개시켰듯, 매달 3,000명에게 세례를 준 사역을 비유한 것이었다.
17년 전, 군 선교 현장으로 부르실 때 환상으로 보여주셨던 비전이 매달 3,000명의 합동 세례라는 열매로 결실을 보았다.
신실했던 K참모총장님, 군단장 취임 한 시간 전 손잡고 기도했던 P교육사령관님, 친밀함 속에 결단해 준 O훈련소장님… (후에 이분들 중 두 분도 4성 장군으로 승진하는 축복을 받았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그분들을 그 시기 그 자리에 모아주지 않으셨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내 마음에 교만이 싹틀 때마다 겸손의 브레이크를 걸어주셨고, 우여곡절 끝에 군 선교의 사명을 마친 나를 아르헨티나 이민 목회라는 새로운 길로 인도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사로 살아 온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읊조리며 글을 마친다.
기억력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주낙황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