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그 신학적 정체성을 웨슬리 신학과 사중복음에서 찾는다. 그러나 웨슬리 신학과 사중복음간의 역사적, 신학적 스펙트럼의 차이로 인해 때로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때로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이해되며 학습되어 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선순위의 문제에 있어서, 웨슬리 신학이 먼저냐 아니면 사중복음이 먼저냐 아니면 웨슬리 신학이 성결교회의 정체성인가, 사중복음이 성결교회의 정체성인가 하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논의 및 논쟁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웨슬리신학과 사중복음의 관계를 상호배타적이거나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양립 가능한 관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중복음이 웨슬리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웨슬리 신학은 사중복음에 의해 꽃피웠다고 하는 상호보완적 이해를 위해서는 18세기의 웨슬리와 19세기 성결운동의 사이에 감리교 내에서의 어떤 신학적 변천이 있었는가를 먼저 고찰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웨슬리 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 사상으로부터의 퇴보가 성결운동을 일으키게 된 변곡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감리교 내에서의 신학변천사에 대한 연구는 로버트 차일스의 연구가 독보적이며 탁월하다. 로버트 차일스는 그의 책, “Theological Transition in American Methodism”에서 미국감리교회에서의 1790년에서 1935년까지의 신학적 변천 과정을 다루며 미국감리교회의 신학이 웨슬리 신학에서 여러 가지 신학적 측면에서 상당 부분 이탈했음을 밝히면서, 성결운동이 태동하게 된 감리교회의 신학적 이탈에 관한 논의들을 이끌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계시에 강조점을 두었던 웨슬리 신학이 변천과정을 거치며 이성을 강조하는 신학으로 변질이 되었고, 인간의 전적타락이 부인되고 도적적 인간이 강조되는 결과에 봉착하게 되었다.
박창훈 교수는 이 책의 서평에서, “본 도서는 특히 감리교회에서 왜 성결운동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성결운동은 어떠한 신학적인 규범을 따르려고 했는가에 대한 이정표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되었다.”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러한 박창훈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성결운동은 변질되고 변천된 감리교의 신학으로부터 웨슬리를 다시 건져내는 운동이었으며, 많은 감리교인들을 다시 원래의 웨슬리의 복음적인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운동이었다.
이제 웨슬리 신학과 사중복음간의 신학적 연속성과 유사성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II. 성결교회 신학의 역사적 특징
예성과 기성을 포함한 한국의 성결교회는 18세기 영국의 웨슬리에게서 시작하여 19세기 미국성결운동을 거쳐 20세기를 넘어 21세기 까지 한국성결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적지 않은 역사적/신학적 변화와 발전의 부침을 경험해 왔다.
그 시간의 여정 속에서 한국성결교회는 독특한 신학적 특색을 갖게 된다. 신학적으로는 웨슬리안이지만 그것은 구원론의 맥락에서 이중예정론,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속죄론, 성도견인론 등의 칼빈주의 전통에 서 있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 조건적 선택, 보편속죄론, 성도의 타락의 가능성 등을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한국성결교회는 분명 웨슬리안이지만 감리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교리와 실천 모든 부분이 웨슬리의 신학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웨슬리는 유아세례를 적극찬성하고 실천했지만, 한국성결교회는 전통적으로 헌아식을 행하고 있다.(물론, 비교적 최근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는 유아세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는 성결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웨슬리는 인간의 구성요소를 분명 이분설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는 삼분설에 가깝다.
재림론에 있어서도 웨슬리는 20세기초반 신학논쟁의 산물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의 패러다임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각자의 신학적 전통에 따라 웨슬리를 전천년주의자로 혹은 후천년주의자로도 해석하지만, 이 도식에 웨슬리를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은 일면 시대착오적이다.
이렇듯, 한국성결교회는 분명 웨슬리안의 신학적 전통 위에 서 있지만 모든 세부적인 신학적 내용들까지 웨슬리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깝게는 한국성결교회는 19세기 미국성결운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성결운동의 주요한 인물들은 누구인가? 성결교회의 역사를 역으로 추적해 보면, 정빈과 김상준이 동양선교회 소속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것이 그 신학적 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경성서학원을 세운 카우만과 길보른은 A.B.심프슨에게 선교의 도전을 받아 동양에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고, 그들은 무디성서학원에서 공부하였고, 만국성결연맹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동양선교를 위해 파송되었다. 그리고 만국성결연맹은 미국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가장 중요하고 비중있는 교단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시조는 그 유명한 피비 팔머(Phoebe Palmer) 여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찾는 작업은 이렇게 다양한 신학적 배경 속에서 어떠한 사료를 통해 어떠한 해석을 내리는 가에 따라 너무도 다양한 강조점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성기호 박사의 영향 아래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심프슨의 기독교와 선교사 동맹(C&MA)와의 교류를 한동안 활발히 하며(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교류가 끊긴 상태지만 다시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심프슨과 성결교회의 연결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심프슨은 웨슬리안이 아니며, 웨슬리안 성결교리의 가장 중요한 쟁점인 원죄제거설(eradication theory)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OMS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초기 동양선교회를 조직했던 카우만과 길보른의 신앙적 혹은 신학적 뿌리로부터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카우만과 길보른이 무디성서학원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무디성서학원과의 연결을 통해 무디의 전도본위의 영성이 성결교회의 초기 지도자들에게 전수된 것은 사실이지만 무디 또한 웨슬리안이 아니며 원죄제거설이 아닌 두 본성론을 주장하였다. 피비 팔머 여사의 제단신학은 성결의 순간성을 강조하지만, 성화의 점진적인 측면을 간과했다는 측면에서 이 제단신학을 성결교회의 성결론으로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하며, 팔머 여사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결한 삶에 대한 열망으로 성결운동을 일으켰으나, 부흥운동으로 꽃 피어난 성결운동의 가장 소중한 신학적 열매인 사중복음의 패러다임으로 팔머 여사를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므로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은 완전히 웨슬리적이지도 않으며, 완전히 심프슨 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무디적이지도 않으며, 완전히 팔머 여사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언급한 사람들의 신학적 영향이 성결교회의 신학 형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러한 다양한 신학적 전통들이 성결교회 안에서 재해석 되어 성결교회만의 독특한 신학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II. 사중복음의 원형으로서 웨슬리 신학
성결교회의 신학을 사중복음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웨슬리에게는 중생과 성결의 교리는 있지만, 신유와 재림의 교리가 약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가지 주제에 대한 원형을 웨슬리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사중복음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널드 데이톤 교수는 그의 명저, “Theological Roots of Pentecostalism”에서 사중복음의 신학적 뿌리가 웨슬리에게 있음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연구의 혜택은 더 이상 웨슬리 신학과 사중복음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서서, 상호보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학적 스펙트럼을 넓혀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을 웨슬리 신학으로 정립해야 한다거나, 사중복음으로 정해야 한다는 논쟁을 넘어서서, 웨슬리 신학과 사중복음을 조화롭고 균형 있게 이해하는 포용적인 접근 방법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국성결교회가 근간으로 삼아야 하는 웨슬리 신학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는 보편적 속죄론이다. 웨슬리는 칼빈주의 이중예정론을 비롯하여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를 제외한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총, 신자의 타락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교리 등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는 칼빈주의와 머리털 두께 차이밖에는 나지 않지만 예정론을 비롯한 구원론의 문제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자들과 많은 시간을 치열하게 논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교리 가운데서도 웨슬리가 가장 경계했던 교리 중의 하나가 제한적 속죄론,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된 자들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교리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속성, 그리고 성경의 증거에 의지하여, 제한적 속죄는 복음적인 교리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가르친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보편적 속죄론에 대한 이해는 많은 성결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장로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심프슨은 엄격한 장로교회에서 성장하며 신학교육을 받고 장로교 목사로도 활동하였지만, 그는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포기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제한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셋째, 선행적 은총론이다. 선행적 은총으로 인해 하나님에 관한 지식, 도덕법, 자유의지, 양심, 악을 억제하려는 마음등이 회복되었다. 선행적 은총의 신학적 함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Total Depratity),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Salvation by Grace),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책임성이 분명 존재하다는 것(Human Responsibility),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the Offer of Salvation to All) 등이다.1)
넷째, 이 선행은총의 교리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능력 또한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곧, 자유의지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대한 강조점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결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교단의 이름에도 나타나듯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조점이며, 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 혹은 성결교리이다. 웨슬리는 인간이 죽기 전에 모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온전한 성화의 단계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다섯째, 이 외에도 웨슬리는 중생에 대한(웨슬리는 신생이라는 표현도 아울러 사용하였다) 강조 또한 사중복음에 대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종교개혁 신학의 충실한 추종자였다는 것은 그가 강조한 이신칭의(중생)의 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로 인한 칭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믿음을 통해 획득되는 의로움, 곧 칭의(혹은 중생)에 대한 웨슬리의 확신은 성결운동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언급하였듯이 신유와 재림 교리 또한 웨슬리에게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이 외에도, 한국성결교회에 미친 웨슬리 신학의 유산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천적 신학의 차원에서는 성경의 권위의 충족성 인정, 체험적 신앙, 열정적인 복음전도, 사회적 성결에 대한 실천 등등 웨슬리가 그의 후예들에게 남겨준 신앙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가 이렇게 많은 신학적 유산을 성결교회에 물려주어 웨슬리와 성결운동의 사중복음 사이에 상당히 많은 신학적 연결고리들이 있지만 웨슬리 신학과 사중복음의 가장 큰 연결고리는 성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양쪽 모두 이 세상에서 온전한 성화가 가능하다고 믿고 그렇게 가르쳤다. 이것은 칼빈주의자들이 온전한 성화는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고 가르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를 그리스도인의 완전, 완전한 사랑 등으로 표현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이전에 가능한 성화를 추구하도록 촉구하였다.
성결운동의 지도자들 또한 원죄의 제거설을 굳게 믿으며 이 세상에서 죄를 뿌리 뽑고 온전하게 거룩한 상태에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기에 우리는 웨슬리와 성결운동의 가장 큰 공통분모는 성결론이라고 결론짓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김영택 목사 [삼성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