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정빈과 김상준에 의해 시작된 한국성결교회의 과거역사의 면면(面面)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장과 발전의 뒤안길에는 교단의 발전과 부흥을 위해 드러나지 않게 봉사하고, 헌신한 성결인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초창기에 지대한 공을 남긴 헌신과 믿음의 여장부 홍대실 권사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1. 성장과 입신
홍대실(洪大實)은 1901년 10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금곡면 월곡리에서 부친 홍석필(洪錫弼)과 모친 정건백(鄭健伯)의 2남 2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홍대실은 완고한 전통적인 유교가정이었지만 너그럽고, 인자한 아버님의 가르침과 어지신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큰 어려움 없이 곱게 성장하였다. 그녀는 같은 용강군에 살고 있는 장학섭 청년과 부모님의 소개로 중매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생업을 구축하며 시간이 갈수록 손을 대는 일마다 흥왕 되어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물질이 쌓이는 것에 비례해서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한쪽이 비어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이 땅에서 하는 생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마음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발전하여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봄 그녀는 교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하나님의 남다른 은총과 섭리가 있어서인가? 홍대실은 교회에 발을 디뎌놓기가 무섭게 신앙의 진보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열심히 교회를 출석하여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중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열심을 다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중에 1928년 입석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2. 교회 건립과 신사참배 거부
그녀는 기도 중에 남편의 고향인 용강군 지운면 진지리에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 교회를 설립하였다. 진지리에 교회를 세운 것은 출석하는 입석교회가 거리가 먼 연유도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이보다 성경말씀을 읽다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마가복음 16장 15절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에 큰 감동을 받은 데서 기인하였다.
홍대실은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홍대실이 교회를 나가면서 간절히 기도하며 전도한 결과로 남편이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게 되자 그녀는 더욱 큰 힘을 얻고 교회봉사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봉사하는 중에 집사직분을 받게 되었다. 홍대실 집사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며 힘든 줄도 모르고 주께서 세우신 교역자들을 섬겼다. 교회의 힘든 대소사를 맡아 수고하면서 전도를 열심히 함으로 신앙의 모범된 삶을 살며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였다.
그러는 중에 1943년 5월 24일 일제가 성결교회 교역자와 장로, 집사 등 300여명을 검거할 때 투옥되었다. 홍대실 집사는 옥고를 치루면서 고문을 당할 때 자신을 위해 십자가의 고초를 당하신 예수를 바라보며 기쁨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믿음으로 승리하였다.
3. 홍대실 권사의 사역과 헌신
6.25한국전쟁 피난기간 중에 부산 동래온천교회 집사로 피택받아 충성과 봉사를 하다가 서울로 귀경한 홍대실 집사는 1954년 성결교회 모교회인 중앙성결교회 집사로 임명받았다. 1959년에는 부인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봉사하다가 신생부인회 전국연합회 부회장직을 수년간 맡아 교단적으로 전국부인회를 이끌며 전국을 대상으로 순회사역을 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안타깝게도 성결교회가 교단분립의 고통 속에 둘로 나뉘어지고 서울신학교가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 남게 되었다. 그러자 성결교회 본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1962년 9월 20일에 서울 충정로 김응조 목사 사저에 성결교신학교 임시교사를 마련하고 개교하였다. 그러나 개인 가정집에서 시작한 신학교가 교사(校舍)가 마련되지 않아 많은 난관이 있었다. 김응조 목사는 절박했던 초창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음 해에 또 학생을 모집하니 역시 50명이다. 이제는 100명이 한 집에서 법석대는 판이다. 온 집안에 사람 천지이다. 안방과 복도까지 공개해도 100명을 수용하기는 불가능이다. 비용 문제도 막심하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교장 김응조 목사는 ICCC국제대회 참석과 성결교신학교 건립기금을 목적으로 도미하였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귀국하였다. 김응조 목사가 자신을 찾아와서 성결교신학교를 건축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조심스럽게 홍대실 집사에게 권고를 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기쁘게 바로 허락하였다.
홍대실 집사는 1963년 11월 10일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대지를 매입하고 238평의 3층 벽돌건물(현, 예성총회 본부건물)을 단독으로 건립하여 신학교 교사로 봉헌하였고, 이듬해인 1964년 8월 20일에는 다시 4층 62평을 증축하여 확장시켜 주었다. 여성의 혼자 힘으로 한 교단의 신학교 건물을 지어 봉헌한 것은 한국교회 역사에 있어서 보기 드문 예외적인 일이었다.
홍대실 집사는 1964년에 중앙성결교회에서 초대 권사로 피택되었다. 그녀는 성결교신학교 수용관리가 현재 시설로는 교단의 교역자 수요에 부족함을 느끼고, 기도하는 중 남편에게 동의를 얻어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미래 백년을 바라보며 자신이 보유한 경기도 안양시 안양8동의 22,228평을 학교교지로 기증하여, 성결교신학교의 안양 캠퍼스시대를 열게 하였다. 성결교신학교는 홍대실 권사가 건립한 행촌동 건물을 신학교 건물로 사용하면서 발전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
건물 건립 이후 성결교신학교는 문교부에 학교법인 성결교신학원 재단 설립을 신청하고 1964년 12월 16일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다. 1966년에는 4년제 정규대학과 동등한 학력인가를 받음으로 오늘의 기독교 명문 사학인 성결대학교로서의 굳건한 발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녀는 성결교신학교 4대 이사장으로 3년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1971년 3월 2일 소천할 때까지 학교 발전을 위해 지사충성하였다.
홍대실 권사는 교회 개척에도 온 힘을 쏟아 생전에 그녀가 건립한 교회는 진지동교회를 비롯하여 강릉교회, 온양교회, 묵호교회, 속초교회, 백은교회, 고길리교회, 대전성결교회까지 총 8개 교회를 건립하여 봉헌하였다. 1968년 4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성락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소리 없이 섬김의 봉사를 하였다.
홍대실 권사, 그녀는 칠십 평생을 오로지 하나님과 주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그리고 예수교대한성결교회와 성결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삶을 살았다. ‘大實’이란 이름 뜻대로 하나님을 위해 ‘큰 열매’를 맺은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살아간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여장부요, 헌신의 여종이다.
정상운 목사 [본지 논설위원.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