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 부활의 공통점은 ‘다시 태어남’이다. 다른 것은 중생은 죄인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인 반면, 부활은 중생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다 육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다시 살아나 천년왕국을 거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이다.
이런 부활의 소망을 가진 중생한 자들이 모인 곳이 우리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모든 지체들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중생한 자들이 가질 것은 영광의 부활의 소망이다. 그러나 단지 부활이 죽어서 살아날 것만 기대하며 사는 것은 아직 어린아이 같은 신앙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부활이 삶 자체일 때 성숙한 신앙의 그리스도인이다.
부활의 삶에 대하여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우선적으로는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기 위한 과정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상황을 음미해 보자. 마지막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졸고 있었고, 그러한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신 예수께서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하셨다. 일어난 제자들이 함께 몇 발자국 떼었을 때에 예수를 잡기 위한 군졸들이 들이닥친다. 잠시의 항거가 있었지만 결국 예수께서는 잡혀가셨고, 놀란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겨우 베드로만이 대제사장의 집 밖을 기웃거릴 뿐이다.
예수께서 ‘함께 가자’고 하셨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정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다. 그 길 뒤에 나타나는 것이 부활의 영광이다.
둘째는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중생한 자들의 부활을 경험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가 소망하는 부활은 먼 훗날에 있을 것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현재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도의 삶 자체는 부활의 연속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에만 부활을 음미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도의 삶 전체 즉 인생 모두에서 날마다 부활을 확신으로 경험하면서 살아야 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의 삶이 되어야 한다. 죽기를 원하는 삶이어야 한다.
셋째는 부활의 실천적 삶이다. 나 자신이 부활을 경험하면서 산다면 이제 그 부활의 삶을 통하여 얻은 기쁨을 이웃에게 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적인 삶이다. 이웃 사랑의 실천이 가난함에 따른 긍휼의 구제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그들 영혼에 있다. 지옥을 향하는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어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이끌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영혼을 살리는 전도와 나라 밖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선교의 일에 매진해야만 한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는 2022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그리고 앞으로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할 중생한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삶의 실천들을 제시해 본다. 각각에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살피고 그 문제들로부터 새로이 부활을 기대한다.
1. 이 나라가 부활하기를
우리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축복을 통하여 이만큼 서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날 부터인가 이 나라는 아주 못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분개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흔히 말하는 대로 ‘해도 해도 너무’했다. 서민들의 눈에는 선을 넘어선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다. 어떤 분은 자살도 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감옥을 가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잘못했으니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문제는 이것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잘못된 사슬이 끊겨 지지 않는 한 이 나라의 부활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나라의 대통령은 국민들의 아버지이다. 잘못한 것은 지적하더라도 아버지를 차가운 감옥으로 보내는 일은 중단되었으면 한다. 이를 위한 우리들이 할 일은 기도이다. 나라를 위해, 지도자를 위해 더 많은 기도하지 못함은 분명 우리들의 잘못일 것이다.
한 때는 지역 논쟁으로 나라가 갈라섰고, 지금은 사상 논쟁으로 갈라서 있다. 일치하여 달려도 시원치 않은 판에 갈라서서 달리면 어떻게 이 나라가 성장하겠는가?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먼저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나라의 합치를 위해 기도할 때 이 나라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기도와 함께 성도가 가져야 할 것은 용서이다. 용서는 내가 용서받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나는 용서 받기를 원하면서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 하옵소서”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다. 예수께서도 정죄치 않으신다. 하물며 인간이 인간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용서로 덮어줄 때 이 나라는 다시 살아날 것이 분명하다.
2. 우리 교단이 새롭게 다시 부활되기를
우리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정말 멋진 교단이다. 가끔은 교단을 스스로 깎아 내리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교단은 자랑스러운 교단임이 틀림없다. 우리 교단은 수많은 어려움들 속에서도 꿋꿋이 성장해 왔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도 선배들은 교단을 바로 세우기 위해 헌신했고, 부흥시키기에 열정을 다했다. 초기 성결교회는 구령 열에 불타오르는 전도 본위의 교회였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개인들의 욕심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은 봉사의 자리라고 말하면서도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 교단을 혼란에 빠트렸다. 개인의 욕심이 나타난 것은 ‘선거’부터 시작된다. 후보는 정책을 제시하고, 투표권자는 그 정책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를 판단하고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돈을 뿌리면서 표를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좋지 않은 선거판을 만들었다. 신앙과 정치는 다르다고도 말한다.
교단 화합을 외치는 후보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단 화합은 지도자들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후보자들이 스스로 교단을 분열시키고 있으면서 어떻게 화합을 이루겠는가? 편 가르기를 멈추어야 한다. 각각의 조직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각각의 조직은 나름대로 교단에 발전을 기했음은 분명하다.
문제는 나를 찍으면 내 편이고 상대방을 찍으면 내 편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놓음으로 교단을 양분화 시켰다는 말이다. 당연히 유권자들은 서로 눈치 보면서 적당히 대응하는 방법들을 터득했다. 정치하는 분들이 스스로 교단의 목회자들을 갈라놓고 화합을 이루도록 노력하겠다고 외친다.
화합을 이루는 길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선거전에서 거칠게 다툰다 할지라도 일단 끝나고 나면 서로 승복하고 협력해서 일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서로 발목 잡기에 분분하면 어찌 교단이 발전할 수 있겠는가? 아마 이것은 우리나라의 민족성일지도 모르겠다. 나라도 정치인들이 양분하여 싸우면서 발목 잡기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까지 파고들었다는 것이 문제 아니겠는가?
부활은 다시 사는 것이니 우리 교단이 다시 사는 부활의 장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 이다. 서로가 인정하고 협력하는 것만이 교단을 새로이 부활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지도자가 되면 교단을 힘 있게 세우고 싶고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헌신한다.
그러나 발목 잡는 일로 인해 번번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이를 중단하고 스스로 협치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 교단은 이 시대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우실 것이라 믿는다.
3. 모든 성결한 성도가 부활을 소망하기를
바울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성도들을 위해서 산다. 복음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복음을 끝까지 전파하는 것이다.
‘살기를 원하면 죽을 것이고 죽기를 원하면 살 것’이라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며 사는 성도라면 세상의 것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구하는 삶이 된다. 우리는 충분히 부활을 소망하며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부활은 죽어야 얻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문제이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더 살려고 발버둥 친다.
부활이 영생과 직결됨을 우리는 잘 안다. 살아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잘 안다. 그러면 아는 것에 우리가 더 할 것은 행동이다. 아는 것에 그치는 신앙이 아니라 행동으로 움직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추상적인 부활의 소망이 아닌 실제적인 소망을 갖자. 부활의 소망 속에서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우리는 우리들 사이에서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 바울은 살전 5:14에서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권면한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화목]을 위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삶이되기를 희망한다.
이 나라가 다시 살기 위해, 이 교단이 다시 살기 위해 그리고 개 교회와 성도들이 다시 살기 위해 화목하자. 때가 악함을 상기하면서 특히 펜데믹으로 교회가 더 많이 준비하고 더 힘써 달려야 할 상황을 맞이한 현 시국에 항상 함께 기쁨 가운데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자.
장종용 목사
포근한교회 / 본지 편집위원
『성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