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는 말
지난 한국교회 역사를 회고하면 한국교회 부흥과 복음전도를 위해 헌신한 여러 일꾼 가운데에서도 우선적으로 기억되는 두 인물이 있다. 그들은 초기 한국교회에 대부흥사로 크게 사역한 김익두 목사와 8.15해방 전후 부흥의 불길을 일으킨 이성봉 목사이다. 이성봉 목사는 한국성결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부흥사로 19세기 위대한 인물인 무디를 연상케 할 정도로 한국의 무디로서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1. 출생과 성장
이성봉(李聖鳳) 목사는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에서 부친 이인실과 모친 김진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6살 때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모친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이성봉의 모친은 신천의 경신소학교의 교원으로 청빙을 받아 3년간 교편 생활을 할 정도로 신학문에 열려있는 개화여성이었다.
이성봉의 모친을 경신소학교에 추천하고 후견인 역할을 한 사람이 김익두 목사로 어려서부터 이성봉은 김익두 목사를 가까이에서 대하고 그의 집회에도 어머니 손길에 끌려 참석하였다. 이성봉은 어머니와 김익두 목사의 영향을 받으면서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가정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자 비탄에 잠겨 고민하다가 생업에 뛰어들어 달구지에 나뭇짐이나 과일을 싣고 30리길 떨어진 평양을 오가며 장사를 하였다. 소년 시절 어머니 권면에 따라 교회에 출석은 하였지만 사춘기 시절 이성에 대한 흥미로 친교 삼아 교회에 나갔다. 면학의 꿈이 사라진 공허한 마음 한 구석에 이제는 오직 돈을 버는 일이 그에게 유일한 삶의 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2. 중생의 체험과 신학교 입학
어머니의 간곡한 신앙의 권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 길로 나가던 이성봉은 19세 되던 해에 그의 마음을 바로 잡기 위해 결혼을 주선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영기 장로 딸인 이은실과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세상을 향해 걸어가던 세속적인 삶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 21살이 되던 1920년 6월 어느 주일에 과수원에서 과일을 싣고 평양으로 가던 도중에 가자묘 앞길에서 원인도 모를 통증이 오른쪽 넓적다리에서 생기더니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주일날 돈벌이 하겠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부모 말 안듣고 제멋대로 하다가 잘되었다.”는 어머니 김진실 집사의 핀잔스러운 책망 속에 3년의 투병 생활을 보내며 인생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회개와 함께 중생(重生)의 체험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철저히 깨닫고 그는 어머니께 불효를 사죄하며 인생의 설계를 다시 하였다. 새롭게 재출발을 한 이성봉은 하나님께 1925년 26살의 나이에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성경공부와 기도, 전도실습 등 영적으로 수련과 학업을 정진하였다. 신학생 시절부터 어린이부흥회를 인도하며 가는 곳마다 큰 부흥을 일으켰다. 신학교 졸업할 당시 3일 금식기도 중에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주께로부터 소명을 받게 되었다.
3. 초교파 부흥사 사역과 임마누엘특공대
1928년 졸업과 함께 수원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는 중에 큰 부흥이 일어나 교회를 붉은 벽돌로 아름답게 건축하였다. 1931년 목포 북교동교회로 파송되어 목회를 하다가 그 이듬해 목사안수를 받았고 유달산 돌을 가져다가 교회를 지었다. 이어서 1936년에 최북단 신의주교회로 전임하여 당시 성결교회 가운데 제일 큰 교회를 건축하였고,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지방 교역자들을 육성하고 신의주 마천동에 지교회까지 세웠다.
신의주교회 목회할 때부터 이성봉 목사는 부흥집회를 인도하며 양시, 안동, 비현 등 여러 교회에서 큰 부흥을 일으키며 부흥사 사역을 시작하였다. 성공적인 부흥집회의 소문은 장로교, 감리교까지 퍼져서 여러 곳에서 부흥회 초청을 받게 되었다. 평양의 경창문 밖에서 천막을 치고 부흥집회를 할 때에는 수천 명이 운집하여 대성황을 이루며 수많은 사람들이 중생의 체험을 하는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1939년 교단 총회 시에 교단 소속 부흥사로 공식 임명을 받으며 전국 순회 부흥강사로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국내는 물론 일본과 만주 지방에 이르러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며 복음 선교에 진력하였다. 8.15해방이 되자 교단 해산으로 문을 닫게 된 신의주성결교회를 재건하였으나 공산당의 방해로 전도활동의 제약을 받자 남하하여 남한 성결교회의 재건을 도우며 부흥사로서의 명성을 떨치었다.
6.25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산당에게 맞아서 죽을 어려움 중에도 살아남게 되자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제2의 소명의 삶으로 생각하고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모토아래 1954년 임마누엘특공대를 조직하였다. 복음전도의 투사로서 전투적인 자세로 사역하며 전국 방방곡곡 산간 오지마을까지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교회를 세웠다.
1955년 서울 신촌의 자택에서 신촌성결교회를 개척하고, 1959년에는 미국교회 초청으로 도미하여 로스앤젤레스로부터 시작하여 9개월간 미주 순회 부흥집회를 열어 큰 은혜를 끼치고 미국교회 성도들로부터 ‘제2의 무디’로 칭송 받을 정도로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다. 1961년 성결교단이 분열되어 1962년 두 개의 교단으로 분립되자 교단 합동을 위한 통일수염을 기르고 400개가 넘는 양교단 교회들을 찾아가 순방 집회를 하며 합동을 위해 노력하다가 1965년 8월 2일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
▶ 닫는 말
한국성결교회가 낳은 위대한 복음전도자인 이성봉 목사는 간결하고, 힘이 있는 순수한 복음 메시지를 담은 불같은 뜨거운 사랑의 설교를 통해 초교파적으로, 해외까지 큰 복음운동을 일으키며 이 땅에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에게 영적인 회심과 감동을 주었다. “순간 순간 주님과 호흡하고, 한걸음 한걸음 주님과 동행하라.”는 이성봉 목사의 말씀은 지금도 오늘을 살아가는 성결인들에게 살아있는 묵직한 말씀으로 뜨겁게 들려온다.
정상운 목사(본지 논설위원,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