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말
3·1운동과 달리 한국교회는 순종(純宗)의 인산(因山)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교회조직을 동원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6.10만세운동 때에 경성성서학원에 재학 중인 천세광(군위성결교회 집사)의 단독 거사참여는 한국성결교회가 개인 영혼구원에만 치우쳐 민족구원의 문제에 등한시 하는 민족성이 박약한 교단이라는 비판적인 지적을 다소나마 일소하게 해주었다.
1. 출생과 성장 배경
천세광(千世光)의 본명은 천세봉(千世鳳)으로, 그는 1904년 3월 7일 경북 군위군 소보면 보촌에서 천기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세광은 비교적 부유한 명망가(名望家)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한제국시대 말경 경복궁 오위장(五衛將)으로 원세개(袁世凱)장군과 함께 활동하다가 낙향한 무관 출신인 조부로 부터 만득장손(晩得長孫)이라 하여 남다른 고임을 받고 자랐다. 부친은 평범한 유교선비였으나, 조부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그는 자연히 유·불 (儒·佛)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천세광은 온 가족이 함께 연중행사로 절에 가서 드릴 정도로 유년시절 불교문화에 젖어 성장하였다.
그러는 중에 14살이 되었을 때에 군위 읍내에 세워진 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3년 만에 우등으로 졸업하고, 보성중학(保成中學)에 입학하였다. 17살에 보성중학에 입학한 해는 1920년으로 3·1운동이 바로 지난 해였다.
천세광은 보성중학에 입학하였을 때 민족주의 의기가 충천해 있었다. 민족적 좌절감 속에 이것을 밖으로 표출시키지 못하고 속으로만 벙어리 냉가슴 앓듯 고민한 그는 우국충절의 마음으로 인해 결국 신경쇠약증에 걸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보성중학을 끝마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양정고보 보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함으로 숙소를 종로에서 북아현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일은 그에게 기독교적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숙소 바로 옆에 동양선교회 본부와 아현성결교회가 속해 있는 경성성서학원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 개종과 중생의 체험
어릴 때부터 유·불교에 깊이 심취된 그에게 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겨 생활의 변화가 찾아 왔으나, 심령상의 내적인 변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전무한 상태일 뿐더러 오히려 기독교를 서양의 사교(邪敎)로 간주하는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1921년 하숙집 옆에 위치한 경성성서학원 남자부 교사를 신축하고 기념하는 전도집회에 참석하여 개종을 하게 되었다. 그가 개종을 결심하게 된 것 은 그날 전도집회의 설교 메시지를 통해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다. 극심한 자학증세로 매일 한숨과 탄식으로 보내는 자기와는 달리,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기쁨에 가득차서 찬송을 부르며, 증거하는 삶의 모습을 보고난 이후이다.
따라서, 그의 개종은 기독교 본질의 신앙적인 접근이 아닌, 현실적으로 드러난 가시적인 결과에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나름대로의 민족구원에 대한 해결책의 방편이었다.
천세광은 지금까지 자신이 신봉해 왔던 유불(儒佛) 양교(兩敎)를 과감히 청산하였다. 이후 그는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에 헌신하겠다는 굳은 결심아래 약 1년간 아현교회에 출석하면서 양정고보 학생들에게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1922년 3월초에 전국교역자 수양대회가 열렸다. 이때 그는 경성에 있는 4교회 연합으로 경성성서학원 침례장에서 전성운(全聖運) 목사의 주례로 침례를 받게 되었다. 침례를 받던 중 그는 “너는 나를 위하여 싸워라”는 음성을 홀연히 하늘로 부터 듣고, 동시에 성신의 검권(劍權)이 손에 하사되는 환상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일후 가족의 반대로 유학이 이루어지지 않자, 고향에 교회를 세울 뜻을 굳혀 가족과 문중친척 등 50호를 돌아다니며 전도하여 결심자 6,70명을 얻었으나, 가족의 반대와 박해로 교회설립에는 실패하였다.
집에서 쫓겨난 천세광은 부근에 있는 조양(朝陽)학원에 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는 군위읍에 있는 근일(槿一)학원 교무주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젊은 교사로 학생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으며, 군위읍교회에 참석하였다.
천세광이 군위교회에 출석하여 열심히 활동하자, 곧 큰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천세광은 군위교회 집사로 청년들을 모아 전도대를 조직하여 자신이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비안(比安)에 지교회까지 세우며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함으로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그의 명망은 점점 높아갔다. 천세광은 신개척한 교회의 교회당 건축과 전도부인(여전도사)의 청빙을 위해 40일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매일 전교인이 모여 기도회를 가지던 중 30일이 지난 어느 날 천세광이 설교를 하고, 기도를 시작할 때, 성령의 역사가 요한복음 3장 38절의 말씀과 함께 바람처럼 휘몰아쳤다. 그는 갑자기 전신에 전율을 느끼며 방성대곡하며 통회자복하기 시작했다.
천세광을 대성통곡하게 한 죄는 7, 8년 전에 친구들의 유혹에 넘어가 고서(古書) 몇 권을 훔친 일이었다. 기도회를 통해 성령체험과 함께 중생(重生)을 경험하게 되었다. 천세광은 참된 평안과 기쁨을 갖게 되었고 과거의 죄책감으로 부터 해방되어 참된 영혼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 그날 아침 천세광은 보통학교에 옛날 훔쳤던 고서 잡지를 되돌려주었다.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안심하고 가라"는 말을 듣고 사죄함의 기쁨 속에 1923년 11월 16일을 자신이 새로 태어난 중생의 날로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천세광은 바리새인과 같은 틀에서 벗어나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겸손히 더욱 교회를 섬기며, 50여명 집안 식구들을 주께 인도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연단을 받아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되기 위해 경성성서학원에 1925년에 입학하였다.
3. 6·10만세운동과 천세광
천세광은 기숙사에서 같은 군위 출신으로 술꾼이었다가 개종하여 전도인이 된 맹인 김영수(金英洙)와 가까이 지내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천세광이 입학한지 2년째가 되는 1926년에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국장일을 택해서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일제에 대한 한국학생들의 항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순종 인산날인 6월 10일이 다가오자 천세광은 태극기를 준비하고 거기에다가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
그는 아침 일찍 경성성서학원 기숙사에 있는 신학생 30여명을 모아놓고,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반대의사에 밀려 자기 혼자 거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인산행렬이 오후 1시 10분경 삼엄한 일경의 호위를 받으며 막 종로 6가의 오간수교에 이르러 다리를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천세광은 품안에 숨긴 태극기를 꺼내 높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이미 구석구석에 배치된 일경에 의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잠시 소요가 일어났던 인산 행렬은 계속 진행되었고, 천세광은 동대문경찰서에 압송되었다. 그해 7월 7일 그는 경성지방법원으로 부터 보안법(保安法) 위반의 죄목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상고를 포기함으로 석방되어 1개월간 옥고를 치루고 풀려 나왔다.
마지막까지 기소된 11명 주모자 중의 한사람으로 기소되어 법정 판결을 받은 천세광을 통해 6.10만세운동에 기독교의 참여가 이루어졌다. 이 일은 한국교회사와 민족 운동사에 비중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4. 신사참배 항거와 천세광
조선 총독부에서는 6·10만세 운동에 관련한 학생들을 전과자로 취급하여 입학불허의 압력을 가했으나, 천세광은 복학하여 1928년에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 후 그는 조치원교회의 주임으로 파송을 받았고, 1933년 4월 성결교회 제1회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해교회의 주임으로 전임한 천세광 목사는 1934년 제2회 총회에서 일본 동경에 위치한 동경(東京)교회에 파송되었으나, 곧 4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그는 동경교회에 가기 전에 이미 김해교회에서 부터 문서 선교를 통한 민족 복음화와 민족 의식구현에 주력하였는데, 그것은 「嶺南聖報」에 잘 드러난다. 천세광 목사는 경주교회(1925년)와 부산교회(1939년), 다음 해인 1940년에는 삼천포교회, 그리고 광주교회(1942년)로 전임(轉任)하였다.
그는 1940년 삼천포교회 재임 시에 신사참배운동을 하다가 삼천포 주재소에 검속되어 진주 형무소에서 7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1943년 교단 강제 해산 시에 전국 교역자를 검속할 때 다시 붙잡혀 대구 형무소에서 9개월간 옥고를 치루고 1944년 2월에 기소유예로 출옥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1일에 사상범 예비 검속 때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옥중에서 8.15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는 일제 신사망령과 맞서서 3번이나 구금되면서 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옥중에서도 해방 예언시와 탈옥문을 써서 일경에게 이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다. 이로 인해 악형을 견디지 못할 때에는 불호령을 고문하는 자에게 하므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했다. 그는 3년간 감옥에 갇히는 고난 중에 하늘로부터 “세상에 있을 때에 환란을 당하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성언(聖言)을 들으며, 믿음으로 승리하였다.
해방이 되자 그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구(病軀)에도 불구하고 고향 군위에서 3, 4개월간 치안유지회 위원장을 맡다가 군정(軍政)에 인계하고, 그 해 11월 초순에 경성에 올라와 교회 재건에 힘을 다 쏟았다. 그는 성결교회 재흥총회 의장으로 당선되자 일제 말 해산되고, 없어진 300여개의 교회를 재건키 위해 남선북마(南船北馬)로 동분서주하였다. 그 결과 조국의 광복과 함께 성결교회를 다시 재건시켜 놓았다. 그리고 교회재건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되자 그는 미련 없이 바로 총회 의장직에서 내려왔다.
다시 지방으로 떠나 호남 교구장을 맡아 목포교회를 담임하면서 도서전도회 회장을 맡는 등 호남지역 전도에 주력하였고, 봉산, 통영, 부산 영도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1953년에는 십자군 전도대를 재조직하는데 참여하여, 제3대 대장을 맡아 주로 충주를 중심으로 원주, 안동, 의성, 보촌, 묵호 등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는 36년간 교역자 생활동안 결심자 총 76,294명과 신개척교회 38개소를 세웠다. 1962년 질병으로 요양하기까지 복음전파에 주력하였고, 6.25한국전쟁으로 인한 남북 분단을 가슴아파하였다. 남북통일의 고려연방국을 건설과 통일론을 역설하며, 이 민족의 구원과 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해 기도하다가 1964년 2월 28일 서울 북아현동 고인의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닫는 말
하나님과 이 민족을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사랑하며, 수난과 격랑의 이 민족의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이는 자랑스러운 성결인,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천세광 목사였다.
정상운 목사 / 본지 논설위원.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