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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란 무엇인가?
2022-10-31 오전 10:29:00    성결신문 기자   


국내선교위원회(위원장 송용현 목사) 예배사역분과(분과장 장래혁 목사)에서 주관한 제2회 작은 교회를 위한 예전적 예배학교가 지난 10월 25일 거룩한씨성동교회에서 진행됐다. 지면관계상 강의 내용 전문을 실을 수 없으나 예배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 예전을 통한 예배의 회복, 보이는 복음에로의 도전이 되길 기대해 본다. 원문은 성결신문 홈페이지 참조  [편집자 주]

예배란 무엇일까? ‘예배란 그 교회의 역사와 신학의 총합’이다. 시대와 상황이 변하면 교회들은 각자 처한 현실과 신념(신학)에 따라 살아있는 생물처럼 예배형식을 바꿔간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예배의식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찬이라는 두 개의 축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모든 교회 예배에서 말씀과 성찬은 시대와 환경을 뛰어넘어 예배의 핵심으로 공유된다. 

구약의 제사와 달리, 초기 교회 공동체의 기독교 예배 원형은 요즘 같은 예배형식을 갖지 않았다. 초대교회라면 다 똑같은 줄 알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럼 왜 이렇게 예배형식이 다양했을까. 예배란 ‘그 교회가 살아온 역사와 신학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예배가 역사의 총합이라면, 예배 역시 시간의 흐름과 사회와 문화 환경에 따라 변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예배가 변한다’는 말은 예배 ‘형식’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다음 신학은 다양한 주제, 다양한 관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하지만 신학의 출발점은 모두 같다. 성경이라는 텍스트와 교회라는 콘텍스트이다. 성경과 교회라는 출발점은 늘 하나의 지향점으로 귀속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기서 벗어나 있다면, 우리는 그걸 기독교 신학이라고 부르지 않고, 종교학이나 철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예배란 그 교회의 역사와 신학의 총합이다’라는 말을 종합해 보면 기독교 예배엔 형식적 원리와 내용적 원리가 있는데, ‘형식은 변하되(임시적),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영구적).’고 할 수 있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의 환경이 예배형식을 변형시킨다. 단, 변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기억을 나누고, 떡을 떼는 것’. 물론 여기에는 기도와 찬양 감사의 응답같은 것도 포함된다. 

초기 교회 예배는 확실히 ‘말씀(그리스도의 기억)나눔과 성찬(교제)’/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만나는 매우 단순한 얼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얼개에 붙은 세부 사항들은 모든 교회가 동일하지 않았다. 단, 그 모임이 다른 모임과 차별성이 있던 지점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기억’이라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기억이 이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원동력이 된다. 이게 기독교 공동체의 원시 예배형식이다. 

그런데 이런 형식에 점차 세부적인 순서가 붙게 된 건 순전히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아졌으니 신분확인이나 결속력 차원에서 여러 예식이 따라붙게 되는데, 이런 모든 예식엔 늘 옛 기억을 의미 있게 재생시키는 신학화 작업이 따라붙게 된다. 대표적인 게 4세기 이전 교회에서 실시하던 입교 교육과 세례, 그리고 세례 후 받게 되는 예배 교육, 이걸 미스타고지(mystagogy), 또는 ‘신비교육’이라고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 공동체는 자기의 색깔을 점차 확실하게 다져간다. 그러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합법적인 종교로 지위를 격상하면서 교회는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 4세기 들어 교회의 예배는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 사회적 지위가 격상되니 예배형식이 점점 화려해지는데,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유일한 종교로 선언하자, 교회 예배는 황제 의전 형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런데 9세기경 다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거대 제국이 유럽에 등장하면서 서방교회 예배 역사는 다시 한번 전환기를 맞이하고, 나중에 16세기 들어 개신교회와 로마가톨릭의 예배 개혁이 양편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트게 된다. 그런데 예배의 역사에서 중요한 점 하나는 말씀과 성찬이라는 굵직한 골격이 지난 2천 년간 이어져 왔고, 시대와 문화, 신학에 맞게 변형을 했다는 것이다. 

게르마누스는 성찬례가 희생의 재현이며, 동시에 ‘창’을 들고 십자가형을 재현하는 역할은 사제의 임무로 규정한다. 초기 교회에서 십자성호는 하나님의 인치심인 세례를 기억하는 의미이지만, 성찬 때 떡과 포도주에 십자성호를 긋는 경우는 세례가 아니라 희생 제사의 상징적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정교회나 성공회, 로마가톨릭에선 성찬이 희생제의라는 신학적 합의가 있기에 떡과 잔에 십자성호를 그리는 게 당연하지만, 신학적으로 희생제의의 반복을 거부하는 루터교회와 여타 개신교 진영에선 성찬 때 십자성호 긋기를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게르마누스에 따르면, 집례자의 복장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암시한다. 사제의 진홍색 제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쏟아진 피이고, 보라색 망토는 수난이며, 허리에 맨 끈은 예수를 결박한 동아줄이다. 떡과 잔이 올려지는 제대(祭臺)는 그리스도의 무덤이고, 떡을 담아 제대 위에 올려진 성합(Ciborium)은 골고다 언덕, 포도주잔을 덮은 천(Velum)은 아리마대 요셉의 묘지로 주님의 시신을 옮길 때 그분을 감싼 세마포를 상징한다. 

예수의 십자가형을 재현한 정교회 비잔틴 전례는 게르마누스가 설명한 방법과 집례 방식 그대로 오늘까지 집례된다. 로마가톨릭에선 비잔틴 전례와 차이가 있지만, 미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상징한다는 부분은 공유한다. 제대(祭臺)를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이해한다든지, 성찬을 희생제의로 이해하는 방식은 똑같다. 

분명히 예배엔 상징이 가득하다. 하지만 오래된 것이라고 무조건 가져다 쓰기보다 그 유래와 이유를 알고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예배 용어도 마찬가지인데, 성만찬을 희생제의로 이해하는 정교회, 로마가톨릭, 성공회는 제사의 단상이라는 뜻의 ‘제대(祭臺)’가 맞지만, 신학적으로 이를 거부하는 프로테스탄트 계열에선 ‘성찬대’ 또는 단순히 ‘식탁’(Table)이라고 해야 옳다. 예배의 상징과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것은 목회자뿐 아니라 교인을 위한 교육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예배 디자인을 얼마나 멋지게 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 즉, 말씀과 성찬에 담긴 의미들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내느냐 하는 데 있다. 

최주훈 목사 [중앙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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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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