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말
한국성결교회는 정빈, 김상준 두 한국인 전도자의 자생적 개척에 의하여 1907년 태동되었다. 순복음으로 불리운 사중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세운 한국성결교회를 해방 전후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지도자는 성결교회 교부(敎父)로 일컫는 이명직 목사이다.
1. 이명직의 성장과 입신
이명직 목사는 고종 27년인 1890년 12월 2일에 서울 충정로에서 이성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성태는 궁중 주전원 전무과 주사로 있었으나 생활은 어려웠다. 이성태는 구한말 차츰 무너져 가는 조정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며, 사법권이 1909년 일본으로 넘어가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아들 명직에게 정치에 입신하여 출세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명직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목적에는 그의 부친과 뜻이 같았으나 그 방향은 달랐다. 이명직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불교에 귀의하여 도승(道僧)이 되어 평생을 바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어렸을 때의 종교 심성의 발휘는 불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기독교를 알게 된 것은 종로에 있는 황성 기독교청년회(YMCA) 학관에 입학할 때였다.
이후 이명직은 박감은과 결혼하고, 1년 후인 19살 때에 부친의 뜻을 따라 정치학을 공부하려고 1909년에 일본 유학길을 떠났다. ‘배워야겠다’는 굳은 신념 아래 무단가출의 형태로 무작정 일본에 건너간 그는 거의 1년 동안은 방황하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
그러던 중에 그의 인생을 변화시킨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동경 거리를 걷다가 한 모퉁이에서 요란한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들려와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거기에는 구세군 전도대가 열심히 전도하고 있었다. 할 일 없이 거리 구경을 나온 터이라 전도 강연을 들었다. 전도 강연을 들은 이명직의 마음은 이상한 충동을 받았다. 그 뒤 어느 날 저녁에 동경 YMCA 총무 김정식을 만나 기독교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기독교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기독교로 입신한 후 이명직은 주일마다 한국 유학생들이 YMCA 회관에서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김정식의 안내로 동양선교회에서 경영하는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1909년 5월 3일 나까다 쥬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2. 성결의 체험과 사역
1911년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이명직은 개성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14년 성결교회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그는 10년 가까이 중생의 체험을 잊고 생활하다가.
1920년 겨울 동양선교회 감독 킬보른과 자기 동료 목사들에게 지나간 자기의 허물과 실수를 고백하고 영적인 구도행각을 재개하였다. 1921년 가을 어느 날 자신의 성결을 위해 골방 문을 걸어 잠그고 성결의 확신이 있기까지 기도하였다. 문을 잠그고 기도를 한지 3일째 되는 저녁에 주의 음성이 임하고, 순간적으로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다. 웨슬리(Wesley)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의 체험과 같이 그의 이 성령체험은 그 때까지의 모든 갈등과 내적 모순을 소멸시키고, 그로 하여금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가지게 하였다.
이명직 목사의 성결의 체험은 그의 주변을 변화시키고, 신학교 및 성결교회의 부흥운동으로 확산되어 1921년 성결교회 대부흥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1922년에는 성결교회의 유일한 기관지인 『活泉』을 창간하면서 주필을 맡게 되었다. 1929년에 들어와서 동양선교회 조선교회 감독의 고문(顧問)을 맡게 되었고, 이후 이사가 되었다. 1933년 성결교회 제1회 총회에서 초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5년에는 경성성서학원 원장까지 겸하며 해방 이전 신학교와 한국성결교회 교단 총책임자로 사역하였다.
이명직 목사는 『4천년사』, 『구약 영해전집』등 대소 저작 24권을 남겼다. 이명직 목사는 실로 사변적인 이론과 추상적인 논리로 이루어진 학문으로서 만의 신학을 부정하면서 생생한 신앙체험과 구체적 목회현장과 연결을 맺고 있는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신학체계를 세우기 위해 분투하였다.
그 결과 이명직 목사의 독창적인 교리는 아니나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를 이루는 신학내용인 사중복음을 한국성결교회의 근본신학으로 확립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3. 일제의 탄압과 수난
일제는 1942년 3월 강제로 한국교회를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으로 개편케 하고, 성경과 찬송가의 일부를 삭제하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창간 20년의 성결교단 기관지 『활천』(통권 241호)을 폐간시키고, 1943년에는 경성신학교를 폐쇄했다.
그리고 성결교회에 대해서는 4중복음의 교리 가운데 재림신앙이 일본 천황의 존엄에 비례가 된다고 하여, 1943년 5월 24일 전국의 성결교회 교역자와 장로, 집사 등 300여명을 검거하였다. 이 때 이명직 목사도 교단의 대표로 검거되어 5월부터 12월까지 8개월 옥고를 치루었다.
8.15 해방 후 교회가 복구된 뒤, 그는 교단 해산의 책임을 통감하여 서울신학교 교장으로 추대받음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신학교 지도자들이 납북되자 1951년 서울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신학교 발전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1961년 정년을 맡아 학장직을 사임하고 명예학장으로 있었다. 1973년 3월 30일 7시 30분에 84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닫는 말
한국성결교회는 한국인으로 시작한 자생적 개척교단으로, 복음으로는 비교파적이고, 초교파적인 선교단체(복음전도관)에서 기성교단으로 전환, 성장하였다. 이명직 목사는 한국성결교회의 초기 성장기의 과정에서 사중복음을 자신의 체험 가운데 새롭게 성결교회의 집약적 중심교리로 발전시킨 한국성결교회의 교부(敎父)였다.
정상운 목사 [본지 논설위원.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