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성결대학교 신학대학원은 해외 석학 미하일 벨커(Michael Welker) 교수를 초청 학술세미나를 진행했다. 벨커 교수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석좌교수이자 ‘국제적-학제간 신학연구센터(FIIT)’의 소장이며 지난 30년간 신학자로서 과학자들과 함께 신학과 과학의 대화 및 학제 간 국제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해 온 이 분야 최고의 석학이다. 통역은 김영택 교수(삼성교회)가 진행했다. 지면관계상 전문을 다 게재하지 못하고 이날 강연의 일부만을 옮긴다. 전문은 성결신문 홈페이지를 통해 볼 수 있다. [편집자 주]
[미하일 벨커(Michael Welker) 교수]
1. 정신은 무엇이며 영적 몸이란 무엇인가? 부활하신 분의 실체
20여 년 전, 동료들과 저는 신학자와 자연과학자들 간의 대화에 대한 다년간의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 연구의 제목은 “종말론의 문제에 대한 신학과 자연과학” 이었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 개개인의 삶의 문제뿐 아니라, 지구 전체, 우주 전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다” - 이것은 결국, 성경 전통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종교성과 기독교 신앙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신학교육을 받은 한 영국 물리학자의 유용한 통찰이 우리에게 한 가지 길을 제시했습니다. 성경전통의 중요한 종말론적 진술은 각각 유한한 생명과 영원한 생명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연속성은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통해 나타납니다. 연속성은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 안에서 나타납니다. 새 창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언급에서 불연속성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연속성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환상의 세계가 아닙니다. 정신과 영적 몸에 대한 말은 사라질 삶과 사라지지 아니할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전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면밀히 살펴보았습니다. 최초의 충격적인 깨달음은 부활을 육체적 소생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부활에 대한 비판자들 뿐만이 아니라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에 의해서도 발생합니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부활이 육체적 소생이며, 이 소생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에 대한 시험이라고 주장합니다. 부활에 대한 비평가들 역시 부활에 대한 담론은 육체적 소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든지 부활을 믿는 자는 진리와 실체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부활 증언을 면밀히 살펴보면 완전히 다른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생선을 드시는 장면을 포함한 누가복음 24장의 두 가지 언급이 예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추측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언급과는 별도로, 부활에 대한 모든 증언은 부활하신 주님의 감각적 임재와 나타나심 사이의 매우 자극적인 긴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 곧 신적 현현에 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의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의심하였더라”
성경전통에도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자기 현현에 직면 했을 때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 라고 말했다. 도마는 “죄송합니다. 예수님, 내가 당신을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특별한 만남입니다.
일관되게,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과 증인들이 즉시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닫힌 문을 통해 들어오십니다. 예를 들어 엠마오로 가는 길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빵을 떼실 때 제자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보이지 않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은 평화의 인사, 감사의 기도, 떡을 떼는 모습, 성경과 메시아의 비밀을 열어 보이신 모습 등 부활하시기 전 예수님의 모습과 연속성 가운데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신학자 프랜시스 피오렌자는 2,000년 동안 우리의 공동예배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부활하신 주님의 자기 현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간파했습니다.
부활의 현현은 증인들의 눈 앞에서 영화처럼 흘러가지 않습니다. 부활의 현현은 증인들을 부활하신 분의 부활 이후의 삶으로 끌어들여 참여하게 합니다. 증인들은 “그의 몸의 지체”가 된다고 신학적 언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 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증인들의 충만함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 참으로 물질적 성질을 얻게 되고, 증인들은 그분의 삶을 공유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영적 몸은 단순히 기억과 사상의 거대한 집합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예수님과 그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순수한 영적” 친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부활하시고 높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증인들 가운데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새롭게 드러내시는 “그분의 영 안에서”의 실제 삶, 즉 늘 새로운 육체적 자기 표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더 이상 육체를 따라 예수를 알지 아니한다”라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그의 육체적 존재의 견지에서 보면 불연속성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육체적-영적 연속성 속에서 자신을 현존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분은 부고 기사에서 “우리의 사랑스러운 기억 안에서 당신은 살아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방식으로만 그의 추종자들의 기억 속에 현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사실을 포착하지 못합니다. 결정적인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구현하고, 그 분 안에 살고, 그분을 통해 유익한 방식으로 빛을 발하는 공동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이 지속적으로 빛나는 자기 현현입니다. 정의의 영, 자유의 영, 진리의 영, 이웃 사랑의 영, 평화의 영이라는 위대한 단어는 부활하신 분의 능력과 힘을 표현합니다.
성만찬을 거행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친교의 기초가 모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 집니다.
2. 주의 만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주의 만찬은 많은 기독교 교회에서 교회 생활의 근원이자 정점으로 여겨집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만찬의 의미와 성만찬을 올바르게 거행하는 방법에 대한 열띤 논쟁이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만찬을 거행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방식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이는 신약성경에서 여러 차례 증언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씀은 방향을 제시하는 가장 큰 힘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제정하신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성경적 기준 없이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종교적, 비종교적 의식 및 식사 축하 행사와 혼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만찬의 의미와 아주 큰 방향성의 힘을 잃게 됩니다.
1) 상징적 공동식사로서의 주의 만찬과 빵과 포도주에 담긴 창조의 선물
주의 만찬은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가 아닙니다. 일반적 식사 혹은 축제적 식사와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식사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또한 주의 만찬은 어떤 음식으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라는 창조의 선물로 기념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중요한 점입니다. 창조의 선물? 이것은 자연의 선물일 뿐만이 아니라 자연과 문화가 함께 작용 해야 하는 선물입니다. 곡식과 포도의 자연적인 성장과 인간의 정교한 협력이 함께 어우러져야만 이러한 창조의 은사를 우리 가운데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창조의 선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좋은 이유입니다.(Eucharist- 감사의 의미가 담긴 성찬: 역자주) 우리는 성장과 번성, 파종과 수확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의 질서에 대해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자신의 은사와 기술로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여 동료 인간들에게 나누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로 중요한 점입니다. 이 감사는 엄숙하고 평화롭게 함께 모여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의 빛나는 모범을 보여주는 공동체를 기뻐할 때 더욱 깊어집니다. 이 상징적인 공동식사에서는 모든 참가자가 동등하게 대우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같이 구원의 잔을 마시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해도 되는지에 대한 논쟁이 항상 일어나곤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돌보시며 창조적인 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창조적인 영에 대한 기쁨은 성만찬을 기념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이 평화롭고 상징적인 친교 식사만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경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구출되신 밤에”라는 중요한 말이 빠져 있습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그분이 잡히시던 밤에” 혹은 ‘그분이 배신당하시던 밤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은 선한 창조와 즐겁고 평화롭게 모이기를 기꺼이 원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서로에게 정의를 행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만찬은 (아주 극적으로) 완전히 정반대의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네번째로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조차 배신당하고 넘겨지던 밤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만찬은 십자가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만찬을 축하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완전한 계시가 영원히 이루어질 때까지 이 죽음의 기억을 선포하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가 변장하지 않은 영광으로 오실 때까지)
통역 김영택 목사
삼성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