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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회기 총회 순교자 가족 포상자
故 주기철 목사님보다 1년 먼저 순교한 故 박봉진 목사님
2024-06-24 오후 2:14:00    성결신문 기자   


이번 제103회기 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그중에 제일 눈에 띤 것은 순교자 故 박봉진 목사 가족에 대한 시상이었다. 내가 관심이 없어서인지 우리 교단에서 순교자가 있었다는 것을 이번 총회를 통해서 알았다. 때마침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취재를 해서 성결신문을 통하여 교단 성결공동체 일원들에게 길이 알리려고 순교 내용을 알아보는 중에 그동안 교단 차원에서 오래전에 역사편찬위원회(임흥근 목사·성결교회역사자료준비위원장)까지 만들어 책까지 펴낸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교단 장로로서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깊이 반성해 보며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지금부터라도 이 소중한 순교의 역사가 잊혀지지 않고 꾸준히 우리 세대를 지나 다음세대를 향해 더욱 단단한 믿음의 유산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차근차근 나서보기로 했다.

교회의 이미지가 추락한 이 시대에 이쯤에서 이 땅에 교회의 영광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드렸던 순교 정신이 이제 다시금 깨어나야 할 시기인 것 같다.

터틀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행 20:28)이 되고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한국교회는 특히 1930년대 이후 해방 때까지 왜인들과 6.25민족전란 때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공산당에 의해 순교의 길을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정 말엽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주기철 목사보다 1년 먼저 순교한 박봉진 목사를 위시하여 많은 주의 종들이 순교하며 희생을 당했다.

 이들 귀한 순교자들의 피를 먹은 한국교회는 무성한 숲이 되어, 주님이 명령한 귀한 사역을 활발히 지속하고 있다.  한 인간의 죽음이 이 땅에 무슨 의미를 남길 수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故 박봉진 목사는 한국교회 그리고 성결교단에 큰 흔적을 남기셨다. 예수님께서 “네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고, 목숨을 잃고자 하면 얻는다.”고 하셨는데 요즘에는 여기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해졌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순교자들의 신앙을 어떻게 제대로 후손들에게 잊지 않게 전수할 것인가다.

기념사업을 더 활성화 해야 되는데 오히려 사라지고 있다니

이렇게 역사적인 사건을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활성화시켜야 할 때에 한 교단에서는 그동안 드렸던 총회 차원의 기념예배를 중단시켰고 우리 교단은 관심도 없으니 후손들에게 좋은 믿음의 유산을 남겨 주어야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외친 주의 종들은 후손들이 우리 박봉진 목사의 순교 흔적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느냐고 물어 올 때 무슨 말로 변명할 것인가.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이다.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유가족 중 유일하게 우리 교단에서 생존해 있는 손자 박봉준 장로(남부성결교회, 故 박한섭 장로 아들)가 그 명맥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에 성결신문사에서는 이를 위해 이젠 교단 차원에서 꾸준히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예배는 물론 순교자의 깊은 뜻을 기려 다양한 방법으로 기획하여 목사님의 신앙을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기존 역사편찬위원회의와 협의하여 나름대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1차적으로 지난 6월 14일에 박봉준 장로와 함께 기성총회 회관 1층에 잘 마련되어 있는 기념관을 찾아 둘러보고 같은 성결교단인데도 순교자의 역사의식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하는 깊은 반성을 하고 돌아왔다.

(과거) 故 박봉진 목사 순교이야기
 
본 글(과거/현재)은 故 박봉진 목사의 손자인 박봉준 장로(남부교회 시무장로,  서울시 강남구건축사회 회장)와 대담 중에 증언한 내용과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참고 하여 작성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로 점철돼 있다. 특히 왜인들이 한반도를 침범해 저지른 교회 핍박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한일불법강제합병 초기에 기독교 세력을 꺾기 위해 총독 모살미수사건을 조작,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 했는가 하면 사상통일을 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조하고 그 거부자들을 잔인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왜정 말기에는 성결교회 교역자와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해 고문하고 교회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성결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故 박봉진 목사는 1890년 경기도 평택의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하였지만 성결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복음에 대한 구령의 열정을 보였다. 금은방 사업을 통해 재산을 많이 모았던 그는 1923년 평택성결교회를 건축하는데 건축비의 대부분을 헌금하면서 교회건축에도 앞장 섰다. 

1932년 이성봉 목사의 영향으로 42세란 늦은 나이에 남은 삶을 주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여 사역자의 길을 걸었다. 

이후 그는 장호원교회와 여주교회로 파송되어 목회를 했으며, 1941년 5월에 일제의 탄압이 가장 심했던 철원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다. 이미 평신도 시절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한 일로 평택경철서에 수감되어 고통을 당하던 박봉진 목사는 이곳에서도 왜인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철저하게 맞섰다.

신사참배 강요에 철저히 맞선 신앙의 절개를 지킨 목사님 

철원성결교회와 박봉진 목사는 성결교회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간직한 교회이고 목회자다. 철원성결교회는 1914년 11월에 강원도에 세워졌다. 성결교회가 강원도에 세운 첫 교회일 뿐만 아니라 1907년 성결교회의 태동 후 7년 만에 설립된 교회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철원교회는 왜인들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까지 와서 신앙생활을 할 정도로 부흥한 교회였다. 

특히 철원성결교회는 왜인들의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킨 박봉진 목사의 순교 정신이 배어 있는 곳이다. 일본은 1941년 12월호(통권 제228호)를 마지막으로 교단지인 ‘활천’을 폐간하고 1943년 5월 24일부로 전국적으로 성결교회 목회자에 대한 검속령을 실시했다. 그 가운데 철원성결교회 박봉진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철원경찰서의 출두명령(1943년 5월 27일)을 받았다. 그 후 일제는 3개월 동안 박봉진 목사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며 신사참배와 재림신앙의 포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박봉진 목사는 “하나님 외에 참 신이 없으며 일왕도 결국 심판을 받는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손자인 박봉준 장로가 아버지(故 박한섭 장로)에게 들은 할아버지(故 박봉진 목사)에 관한 이야기인데 “어머니 등에 업혀 아버지가 투옥되어 있는 철원경찰서를 찾았는데 취조실에서는 아버지에게 장작 패는 듯한 혹독한 매질 소리와 함께 처참한 비명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해 1943년 8월 10일 고문으로 인해 거반 죽음에 이르렀을 때 감옥에서 풀려나면서 박봉진 목사는 철원도립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모진 고문에 상할대로 상한 몸이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아내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부흥성가 167장 낙원에 이름 “저 좋은 낙원이르니 그 쾌락 내 쾌락일세 이 세상 치운 일기가 화창한 춘일되도다...”를 부른 후 “나는 지금 그곳으로 가오!”하고 8월 15일 새벽 4시경에 순교 하였다.

박 목사는 왜인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철저하게 맞섰다. 일본 형사 앞에 불려간 박봉진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형사 :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박봉진     :  나는 하나님 외에 참신이 없다고 믿는다.
일본형사 :  너는 일본천황이 망하라고 기도한다는데 사실이냐?
박봉진     :  그렇다.
일본형사 :  너는 일본천황도 예수에게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느냐?
박봉진     :  천황도 인간이고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심판에서 제외될수 없다.

당시 이성봉 목사는 박봉진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며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찬송을 불렀다. 박봉진 목사의 사모 신인숙 전도사 등 유족은 후에 순교기념교회로 혜화동성결교회를 개척하여 순교 신앙계승에 노력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 1층 역사관에는 그의 순교정신을 기념하여 제작한 흉상과 혜화동성결교회의 현판이 전시되어있다.

(현재) 교단 첫 순교지인데도 불구하고 찾지 못한 역사 유적지 

철원성결교회와 박봉진 목사의 순교 흔적은 아쉽게도 기념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결교회의 순수한 신앙과 순교정신이 남아있는 철원교회의 순교지는 반세기가 넘도록 남의 땅으로 방치되고 있고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철원군 동송읍 이평로 93 주소지로 가다 보면 옛 북한 노동당사를 조금 못미처 오른쪽 산 아래 철원성결교회 옛터가 있고 표지판만 덩그러이 세워져 있다. 철원으로 가는 길은 줄곧 드넓은 평야와 맑고 깨끗한 산야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가슴이 탁 트인다는 느낌을 받지만 이곳 철원교회 옛터에 발길이 머물면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진다.

1907년 성결교회의 태동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고. 철원성결교회는 왜인들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이 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매년 순교기일이면 후손들은 철원 순교지 및 섬기는 교회에서 추모 예배를 드린다.
현재 국가 소유로 된 철원교회 옛터는 교단 역사 속에서 성결교회 땅이라는 기록이 상세히 남아있다. 1937, 1939, 1942년 기성교단 이사회록에서는 당시 철원교회가 철원읍 관전리 131의 9번지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활천 1938년 11월호에도 철원교회 헌당식 기사와 교회당 사진을 비롯해 공사비, 건축헌금 명단까지 자세히 나와 있다. 하지만 철원교회는 민족의 아픈 역사에 휘말려 지금까지 주인 없는 땅으로 남아있다. 

왜정시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왜인들의 교묘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철원교회는 해방 후 북한 땅으로 편입돼 더 이상 교회로 활동을 할 수 없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교회당도 6,25 한국전쟁 때 완전히 불타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 철원지역은 수복 되었지만 휴전선과 근접한 민통선 안에 위치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없었다. 더구나 철원교회 옛터는 수복 후 주인 없는 토지로 간주 되어 ‘수복지구 부동산 처리 조치법’에 따라 국가 소유로 되었으며, 1990년 점유자들에게 불하되어 있다. 기성교단에서도 철원교회 옛터를 찾으려는 노력은 있었다. 1991년 교단 유지재단은 철원교회 옛터를 찾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교단의 땅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등기 권리증이나 등본을 찾을 수 없어 결국 1년 3개월간의 소송에도 불구하고 교회 터전을 찾는 데 실패했다. 본부에 보관하고 있는 등본 중에는 만주지역 교회와 38선 이북 지역교회의 등본은 있었지만 철원교회 것은 없었다. 

그 후 강원서지방회에서 철원교회의 옛터를 비롯해 인근의 대지를 구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수포로 돌아갔으며, 현재 기성 역사편찬위원회에서 철원교회 옛터 회복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어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옛터를 회복하고 후손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취 시키는 장으로 만들었으면..
 
교회 옛터는 교회당의 기초를 다진 콘크리트 외에 교회라는 흔적이 아무것도 없다.교회당 옛터는 밭으로 변해 교회당으로 가는 길은 사라진지 오래며, 그 주변도 긴 세월만큼이나 무성한 수풀로 둘러싸여 있다. 

더구나 6,25 전쟁 때 불타버린 철원교회 옛터는 수복 이후 주인 없는 땅으로 등록돼 국가소유가 돼 있어 지금은 잊혀진 교회로 전락했다. 인근에 있는 철원감리교회가 종교문화재로 복원되어 있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철원교회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철원감리교회의 옛터는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고 현재 전면 출입구 등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이지만 이곳은 기독교정신을 간직한 기독교 유적지로 조성되었다. 6.25 한국전쟁 때 공산 치하에서 철원감리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청년학생들의 반공 투쟁이 전개한 사실이 밝혀져 문화재로 지정, 국가가 이곳을 유적지로 복원,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철원감리교회보다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철원성결교회는 순교의 빛난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역사 속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너무나 허망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민족의 불행한 역사 탓만으로 돌리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국토의 남북, 동서 X축의 정 중앙부에 위치한 철원이 남북교류의 중심지로 부각 되면서 이곳 철원이 북한선교의 전초기지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원에 있는 성결교회들도 이런 추세 맞추어 이곳 옛 철원교회를 복원해 순교정신 계승과 북한선교를 위한 기념관으로 조성하려는 바램을 갖고 있다. 

철원평화교회 양희선 목사는 “옛터나 인근 지역 대지를 구입 해 기념교회 창립이나 수양관을 건립해 순교신앙 계승과 북한선교를 위한 교육장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최근 기성총회 역사편찬위원회(위원장 박현한 목사)도 철원교회의 복원을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등 순교지 복원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철원에서 옛 성결교회의 명성을 회복하고 북한선교에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위한 첫걸음이 바로 철원교회를 복원하고 박봉진 목사의 순교정신을 계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 - 강병익 장로
기자 : 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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