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목회가 전문형 목회자를 요구했다면, 21세기는 선교 형 목회자를 요구하는 시대이다. 최근 북미 교회에서 가장 화두가 되고 있는 관심과 이슈는, 일터 신학과 사역 혹은 선교이다.
대한민국도 인구 5만을 도시의 유형으로 보고 조사한 결과 80% 이상이 도시에 운집해 살고 있다. 도시라는 공간에 살고 있는 이유는 직장과 사업과 교육의 효율성 내지는 편리성 때문이다. 2021년도 조사에 따르면, 한국 노동 인구 조사에서, 75.2%가 일을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30-40대의 직장인 인구는 90% 선을 넘었다. 갈수록 일터(marketplace)와 교회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선교지로서 전략이 필요할 때이다.
20세기의 리더십을 조정 경기에 비유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인 21세기의 리더십은 레프팅에 비유하곤 한다. 조정 경기는 잔잔한 물가에서 한 사람의 리더의 구호에 맞추어 일률적으로 노를 저으며 나간다. 그러나 레프팅은 매우 다르다. 험준한 물결과 싸우며 각자가 위기 상황에 대처하며 노를 저으며, 전진하는 것이다. 항상 위기와 위험이 도발하는 상황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레프팅 위의 위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20세기와 같은 안전한 조정 경기 같이 가고 있지 않다.
곳곳에 위기의 곡소리와 비명이 들려온다. 단적으로 한국교회는 코로나 이후 9000여 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통계가 있다. 또한 한 기독교 통계 사이트의 조사에 의하면 2023년 11월엔 70%까지 회복하였다고는 한다. 성도가 떠나면, 교회는 문을 닫아야만 한다. 지금 이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항상 이런 위기에는 현장이 답이라고 말한다.
목회 현장도 동일하다. 앉아서 교리나 따지고, 교단 정체성만 찾고 있고 분석하는 일만 몰두 하는가? 목회의 현장은 어디인가? 강단? 행정? 신학?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겪고 있는 직장이며, 이를 이해하고 그 현장에 답을 찾는 것이다.
한 예로,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회당과 성전에서 멋진 설교를 하시던 분이 아니다. 그분은 공생애 동안, 공공장소에 132회 출현하셨는데 그중에 일터에 직접 찾아간 것이 무려 122회나 된다. 그리고 52번의 예수님 비유 중에서 45번이 일과 관련된 것이고 7번만 일과 관련이 없는 비유이다. 그분은 현장에서 답을 직접 찾으시는 철저한 현장 형 목회자이셨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2004년도 일터 미션에서 강조하길, “21세기의 다음 세대 교회의 움직임은 바로 일터의 크리스천들을 통해서 주도하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미국 교회 성장 연구소, 버나 그룹의 대표인 조지 버나는 말하길, “21세기는 사역의 중심이 이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 일터가 중심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제 교회는 세상에서의 전도자로서 일터 선교사 혹은 사역자로(Marketplace Missionary or Ministry) 훈련 시키고, 보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는 성경적 원리를 통해 현장에 적용 시키는 교회와 현장의 통합(integration) 의 원리이다. 분명한 것은 일터 선교는 노동 운동이 아니라 복음 운동이다.
사도행전 1장 4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떠나지 않는 것이 제자(Disciple)이다. 제자는 훈련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로 머물면 평생 교회에서 맴도는 멋진 교회 오빠 언니로 살 것이다. 헌금 잘하고 성경 공부와 공 예배 잘 참석하는 교회에서 헌신하는 자로만 머물게 될 것이다. 교회 중직의 기준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후 그들은 사도(Apostle)가 되었다. 사도행전 2장 이후는 그들은 제자(Disciple)에서 사도(Apostle)의 삶을 살았다.
사도행전 1장 10-11절에 예수님이 승천할 때 그 신비한 광경을 보고 있는데, 두 천사가 나타나 말하길,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만 쳐다보는가?......”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의 승천이 끝났다면, 한마디로 “뭘 봐” 하고, 조롱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제자 삼고...”(The Great Commission) 신비한 모습으로만 맺음 하신 것이 아니다. 너희는 일터(Marketplace)로 가서 제자 삼으라는 마지막 명령을 남기셨다.
한국교회가 일에 관한 왜곡된 두 가지 인식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첫째는 이원론(Dualism)이다. 마치 교회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세상의 일은 세속적인 것으로 죄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일이라는 분명한 성경적 정의가 필요하다. 구약에서는 일은 예배와 동일한 의미이다. 히브리어로 일은 (Avodah)라 한다(출 3:12). 세상의 일도 하나님의 일이며, 예배라는 인식이다. 미국 뉴욕의 리딤버 처치의 담임이었던, 팀 켈러(Tim Kelley)는 그의 책, 일과 영성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썼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하나님은 입을 떼자 마자 일(Work)를 하셨다.” 그 분의 일(창조)은 예배받을 곳들을 디자인(Design)하신 것이다.
둘째는, 이분법(dichotomy)적 일에 대한 편견이 사고의 걸림돌로 뿌리 깊은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육체노동과 혹은 시장의 상인들의 일들은 천한 일이고, 의사 혹은 목사, 법관 등은 선한 일로 구분하는 잘못된 편견(Prejudice)이다. 물론 일에 따라서 사회적인 존경은 받을 수 있지만, 존중의 경중의 개념은 아니다. 동일하게 선한 일을 하고 있는 직업은 존중의 대상인 것이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을 정의하길, “일이란 가능하면 노예들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다.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될 수 있다. 또한 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하는 것일 뿐, 인간처럼 잘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또한 플라톤도 그의 책 좥파이돈좦에서 일을 ‘저주’(Curse)로 정의 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이신 칭의(以信稱義)에 의한 부르심(Calling)이다. 이 부르심은 구체적으로 세상에서의 직업과도 관련이 있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중 하나가 수도사의 영성을 세상으로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수도사의 일만 신성한 일이 아니라, 세상의 직업도 부르심과 신성함을 수행하는 영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이를 그는 만인 제사장(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라 한다(벧전 2장 9절).
요한복음 20장 21절에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내가 너를 보낸다”고 말씀하셨다. 부르신(Calling) 이유는, 단 하나, 복음을 위해서 보내는 일이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1장 1절부터 자신을 복음을 위해서 선택받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혼자 복음을 전하지 않았고, Tent-maker로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업이 같으므로 만났다(행 18:2-3). 그는 가장 작은 동질성의 공동체 단위(The homogeneous unit)를 형성하여 복음을 전했다.
안타깝게도 한 가지 세상에 빼앗긴 언어가 있다. 바로 전도자(Evangelist)라는 용어이다. 스타벅스의 창시자 하워드 슐츠는 자신을 가리켜, 스타벅스 CEO가 아니라, “I am Coffee Evangelist”라고 지칭하며, 스타벅스 브랜드를 알렸다.
그렇다면 현재 교회에서 전도자(Evangelist)라는 용어가 교회에서 혹은 크리스천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인가? 단지 교회 안에 전도 훈련할 때 특별히 사용하는 용어가 아닐까 싶다. 마이클 그린은 초대 교회의 전도는 주로 70% 이상이 평신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또 여기에서 묻고 싶은 것은, 교회의 핵심 DNA, 본질(Essence)이 무엇인가?
제자화도, 예배도, 목회자 예우도 아닌, 바로 복음(the gospel)이 핵심이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며, 근본(아르케)이다. 아브라함도 미리 이방인을 위해서 복음으로 선택을 받았다(갈 3:8절). 이 교회의 본질인 복음(the gospel)이라는 성경적 Platform을 통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선교(Mission) 할 것인가, 이제는 건물 중심적 교회(Building-centered church)에서 선교 중심적 교회(Mission-centered church)로서 다양한 유형의 교회들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기본적으로 신학적, 교리적인 교육은 목회자와 그 후보생들은 아카데믹한 연단의 시간이 분명히 필요하지만 더불어, 현장의 필요성(needs)를 찾는 훈련과 전략, 커리큘럼이 필연적이다. 현실적으로는 교회는 신학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 현장은 피 튀기는 영적인 싸움판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천사도 부러워한다고 했다(벧전 1;12). 역으로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고, 세상에서 자신의 세력이 축소되는 일일 것이다. 그분의 몸인 교회가 충만한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러므로, 교회 자체가 곧 선교이고, 선교가 곧 교회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선교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구약에서의 야훼(WHWH-Lord)는 목자적 개념으로 이동성을 상징한다(시편 23편 1절). 그 반대로 바알 신의 개념은 정착 신 곧 농경 신을 상징한다. 머물러 있는 교회는 물처럼 썩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교회가 일터 사역자 혹은 선교사를 양성하여 보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 교회 생존을 위한 선교 전략의 보물이 숨어 있을 것이다. 올 9월에 송도에서 개최하는 제4차 로잔 대회도 이러한 맥락에서 Marketplace의 한 선교의 방법으로, 주제가 Business As Mission(BAM)이다. 이 일터 선교(Marketplace Mission)는 최대 관심이며, 거슬러 갈 수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교회는 일터에 대한 관심과 전략을 reset하고 성도들을 훈련 시켜야 한다. 그들을 다시 잃어버린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거룩한 백성으로(벧전 2:9) 그 정체성을 회복하고 보내야 한다. 이것이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시작이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에서 시작한 교회의 제도(Christendom)가 교회의 권위로 착각하고, 고고하게 박물관처럼 변하는 안타까움이다. 초대 교회의 신앙 공동체(Christianity)를 회복하는 일이 성경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이는 일터 선교와 일맥상통한다.
에스겔서 48장 35절에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 대한 절망에 차 있을 때 “여호와께서 늘 거기에 계시다.”(여호와 삼마) 라고 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의 현장에 늘 함께 하십니다.
박계문 목사 [전 이랜드 사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