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한국성결교회의 교단 분립에 따라 예수교대한성결교회가 발족되고 그에 따라 1962년 9월 20일 김응조 목사 사가에서 성결교신학교가 시작되었다. 이후 성결교신학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명문 사학으로 우뚝 자리를 잡아 수도권 소재의 종합대학교인 성결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도 그동안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교세에 있어서 한국교회 10대 교단에 속하는 성경적 복음주의 교단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예수교대한성결교회와 성결대학교의 발전과 부흥의 이면에는 이를 위해 헌신, 봉사한 일꾼들을 많이 꼽을 수 있지만 단연코 김응조 목사와 함께 홍대실 권사를 빼놓을 수 없다. (홍대실 권사에 대한 지금까지의 학문적인 연구는 필자의 논문<2004년, 2023년>이 유일하다. 이 글은 필자가 2024년 1월 1일 발행한 『믿음과 헌신의 여종, 홍대실 권사』(성결교회와 역사연구소/킹덤북스, 2024), 50-81 쪽을 정리한 것임을 밝힌다. 각주 임의로 생략함)
1. 한국성결교의 여성사 이해
한말(韓末)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기존 가치 체계와 질서가 이 땅에서 무너짐을 목도하게 되었다.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당시 우리 상황에서 너무나 무력(無力)한 유교 중심의 폐쇄적이며 봉건적 체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이미 앞서서 서학파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 수용으로 수차례의 충돌로 이념적 갈등이 표출되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제물포 입국을 시작으로 개신교 선교가 장로교, 감리교 교파형 선교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더욱 절감하며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한 예가 당시 조선사회 여성들의 기독교 수용은 여성에 대한 근대적 의식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철저히 가부장적인 신분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조선 여성들에게 기독교는 성과 결혼에 관련된 새로운 질서를 제시함은 물론 여성의 개별 인격적 존재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 차원을 보임으로써 여성해방의 길을 열어 주었다. 로스(J. Ross)가 지적한 것과 같이 기독교는 조선사회의 유교적 사회 관습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면서 조선 여성들에게 정당한 사회적 위치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과거와 달리 일부일처주의, 자유결혼, 개가허용, 남녀 동석의 필요성 등 많은 변화가 이 땅에 일어났다.
한국성결교회는 1907년 처음 출발할 때부터 여성사역의 참여의 장을 열어 놓았다. 대표적인 실례로 남녀공학제(男女共學制) 실시를 들 수 있다. 성결교단 초기 교육기관인 경성성서학원은 임시로 개교한 1911년 무교정 복음전도관에서나 이후 1912년 죽첨정 25번지에 새로 학교를 건립하여 전도자를 육성할 때도 남녀공학제를 실시하였다.
창립자 정빈과 김상준은 외국선교사 없이 1907년 5월 30일 출발 이후 아침마다 아침성경교실을 열었는데 이때도 남녀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1908년 40명 남녀학생에서 일년 뒤인 1909년에는 40~50명이 될 정도로 발전되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 남녀가 함께 한 공간에 모여 같이 공부한다는 것은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유교 관습을 깨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경성성서학원의 남녀공학제 시행은 남녀 평등주의 원칙 아래 입학에 있어서 남녀 차별을 두지 않았던 초기성결교회의 여성 사역의 개방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정빈은 일본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할 때 조선의 서울교회들이 예배당 가운데 커튼을 치고 남녀를 분리하여 앉게 하는 폐단을 지적하며 이러한 잘못된 구습(舊習)은 폐지해야할 것을 피력하였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아직도 유교 전통의 구습에 젖은 당시 교회의 부조리한 형편을 비판하며 교회 내의 휘장철폐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것을 보고 우리 교회의 형편을 생각하니 다른 곳은 널리 보지 못하였은 즉 자세히 알지 못하거니와 서울로 말하여도 이런 풍속이 적고 또한 이 때까지 회당 한복판에다가 휘장을 치고 내외를 불통하여 삼사년을 회당에 다녀도 어느 형제와 어느 자매인지를 알지도 못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렇게 서로 막고 통하정이 없으면 어찌 애정이 생기며 교회가 어찌 진보될 수가 있소”.
또한 정빈은 『그리스도 신문』을 통해 일본의 유학 생활 가운데 한국보다 앞서서 개화의 문을 연 일본사회의 여러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여 구습에 젖은 한국교회에 서구적 합리주의와 기독교적인 새로운 윤리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과거의 전통적인 구습이라도 그것이 해(害)하고 이(利)하지 못하면 과감히 수정하고 개혁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혹 누가 말하기를 수백년 내려온 풍속을 일조일석에 고칠 수가 있나 그렁저렁 지내며 보지 이렇게 말하는 이가 많을 터이나, 아름답지 못한 규모는 오랜 것이라도 고쳐야 옳고 또는 일을 행하는 날이 없으면 어찌 열매 있는 날이 있겠소.”
유교의 폐쇄적 전통에 따라 남존여비의 가정 윤리를 고수하였던 당시 한국사회의 구습을 타파하며 1907년 처음 창립할 때부터 장로교, 감리교회보다 앞서서 실행하였던 남녀공학제의 신학교육은 정빈의 개화사상과도 상통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정빈이 만주의 동아기독교로 떠나고 이장하 교수와 최홍은 사감의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하며, 이명직 목사의 부여지방 전도관에서 한 여성과의 시련에 대한 고백적 회개로 인해 남녀공학제가 안타깝게도 폐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명직 목사는 ‘이성과의 연애는 비록 그것이 처녀와 총각 사이일 때에는 죄악’이라고 까지 주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1세대 지도자인 정빈 이후 성결교회 2세대의 지도자였던 이명직 목사가 해방 전후 한국성결교회를 이끌어가면서 한국성결교회 여성 사역은 자연스럽게 그 영향을 받아 퇴조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1994년에 시행된 장로교 통합교단 총회의 여성목사 안수결의에 뒤늦게 한국성결교회는 예성교단이 2003년에, 기성교단이 2004년에 여목사 안수안을 통과시켰다. 여목사, 여장로안이 총회결의 이후 2023년 현재 한국성결교회는 아직까지 여성 총회장을 배출되지 못하고 지방회장에 여성목사가 선출되는 작은 변화를 보이고 있으나 여성 사역이 확장과 발전에 있어서는 여성국 신설 등 여성사역의 제도적이며 현실적인 후속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동안 시대가 많이 변하여 여성의 사회적 참여에 대해 과거 폐쇄적이었던 우리나라도 여성 대통령과 여성 국무총리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는 이런 시대적 변화의 풍조에도 여전히 초기 여성사역의 개방적 자세와 역할 감당에 오히려 후퇴한 감이 적지 않을 정도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여성 목사와 장로 안수를 결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따른 사역의 콘텐츠가 제도화되고 현실로 시행되어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