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요섭 교수(성결대학교 실천신학)
시대진단기획 -3부 예배진단
포스트모던의 회중은 모더니즘(modernism)의 시대정신이 추구하던 객관성과 규율성을 배격하고 주관성과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그래서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 무질서 속에 자기실현을 위한 열망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 열망과 성령이 조우함으로 회중이 그토록 바라는 자기실현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성령의 말씀을 통하여 자기실현을 이루시길 간절히 원하신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인간이 자기실현을 하도록 진리의 본질적인 면은 보수하지 못하고 비본질적인 형식에 매어서 그것을 보수하려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비본질적인 외형(식)을 버리라고 말씀하셨다(마23:13-29).
불과 40여년전 한국교회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방석을 깔고 앉아 드리는 것도 눈총을 받았다. 교회에 장의자가 들어 왔을 때는, 마치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는 교회는 이단이나 되는 것 같은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장의자를 본당에 드려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실정이다.
예배의 본질적인 문제는 사명감으로 지키고 보수해야 한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 심지어 교회사 속에서 왜곡된 부분까지도 사수하려다 영혼구원의 기회를 상실하는 어리석음은 버려야 한다(마23:15). 지난 호의 신학진단(성기호 목사)과 목회진단(최종인 목사)에 이어 예배진단에 관해 성결대학교 전요섭 교수의 견해를 들어보자. 편집위원 허 정 목사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해체주의는 전 세계적인 거대한 영향으로서 교회와 신학 그리고 신앙에 스며들어 현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교회는 강력한 기독교 유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교세가 감소되어 왔는데 그런 가운데 일부 교회는 기현상적으로 꾸준한 성장 또는 급성장이 나타나고 있다. 성장하는 교회의 대부분은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문화, 정서, 감각, 요구를 목회에 충분히 반영한 교회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예배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른바 ‘열린 예배’ 또는 ‘탈의식적 예배’ ‘탈전통적 예배’ ‘자유 예배’ ‘상황화된 예배’ 등 그것을 나타내는 이름은 다양하게 부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전통을 거부하고 문화에 대한 개방성이 높은 예배를 추구하는 것이 교회성장의 주요 원인이며 전략이라고 분석하는데 이의가 없을 정도이다. 전통적 예배는 현대인, 초신자, 구도자들을 위해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하고, 문화거부적이며 성육신적이지 못하다 하여 졸지에 비판받고 예배갱신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예배학자 Ronald Allen도 “모든 사람은 예배가 개선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이런 논의는 이제 더 이상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
하지만 예배의 개선이 대중만을 의식하고 회중지향적인 요구에 이끌려 편의주의, 해체주의, 실용주의, 감각주의를 따르게 되면 그것은 예배의 본질적 성격에 어긋나게 된다. 이를테면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재미있게 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새로운 세대들에게 지루하지 않은 예배형식을 개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동적 예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요구에 기초한다면 예배를 여흥(entertainment)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예배라는 이름으로 인간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위험성이 내재될 수 있는 것이다.
예배의 본질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눅 4:8).
전통적 예배에 반하여 해체적, 비형식적, 탈의식적, 감각적, 문화적, 자극적인 시도는 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교회의 전통과 질서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교회가 지켜왔던 사도적 전승(apostolic tradition)을 무시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세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교회의 전통이 단 번에 무시될 수는 없다. 전통의 역할이라는 것은,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개인이나 공동체가 잘못을 범하려는 우를 막는 하나의 테두리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통을 통해서 이어지는 교육적 역할을 배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공동예배에는 신학적이며 역사적으로 검증된 예배형식 필요
Robert E. Webber는 예배형태는 문화와 세대와 성향의 차이에 따라서 유동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복음적 예배가 되기 위해서 소속 교단의 예배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성경적이며 전통적인 입장을 떠나서는 바른 예배가 될 수 없음을 시사했다.
Ilion T. Jones에 의하면 자유 예배(free worship)에는 위험성과 함정이 있다고 했다. 그도 예배가 회중들의 심리적 요구를 채울 수 있어야 한다고 전제했지만 품위를 지키지 못한 자유 예배 또는 질서를 떠난 예배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Webber도 ‘자유 예배’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것은 형식과 전통을 파괴하는 그런 개념과는 다르며 예배의 요소(찬양, 기도, 성경봉독, 설교, 책임의 응답, 성찬, 친교, 축도)를 포함하여 소집단에서 자유롭게 드릴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James F. White는 예배의 새로운 형태를 시도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그 기준은 신학적이며 역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이라는 것은 전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통을 이탈하고서는 바른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예배일 경우에는 형식이 없이 드릴 수 있으나, 공동예배일 경우에는 반드시 공동체 전체가 해야 하고 동의된 행동양식에 의해서 드려야 한다. 이것은 예배 형태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방법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바른 예배를 위해선 예술적 요소의 분별력 있는 사용과 균형 유지가 필요
Webber는 현대예배에는 음악이 거의 자기도취적이며 이기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으며 흥미 위주와 자극적이고 감정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예배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바른 예배를 위해서는 예술적 요소의 분별력 있는 사용과 균형 유지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다양한 재능과 문화적 자원들을 예배와 신앙을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이런 것들은 규모와 균형이 있어야 하며 항상 그것이 성경에 입각해 있는지를 판단하면서 분별있게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Webber에 따르면 예배갱신의 원칙은 반드시 성경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위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것은 예배의 관심을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된다. 예배는 인간으로부터 기원된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므로 성경에 근거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시대적 조류에 의한 인위적인 조작이나 창작될 수 없는 것으로서 성경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Martin Luther는 바른 예배와 거짓 예배를 분류했는데 바른 예배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고 거짓 예배란 인간이 자의적이고 감각적으로 고안해 낸 예배라고 했다. Nikos A. Nissiotis는 예배는 인간이 그 주도권을 잡고 시작한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응답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간이 구속적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이지 인간이 주체가 되어 그 스스로의 유익(여흥, 즐거움, 감정발산, 축복 등)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예배이다. 따라서 예배는 사람을 즐겁게,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그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예배의 본질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은 변해선 안 되지만 복음을 전하는 형식은 가변적이어야
1988년에 Standford Reid는 카나다 장로교회의 기관지인 The Presbyterian Record에서 “예배가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가?”라는 글을 통해 대중을 의식하고 지나치게 예배 형식을 파괴하는 것은 예배의 성격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했다. Richard G. Jones도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만 하며 예배자가 무엇인가 받으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 예배를 통해 어떤 신선한 느낌을 추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고 그에 따라서 감흥을 받으려고 하는 인위적인 생각은 잘못된 예배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성령께서 인간에게 감동을 허락해 주시면, 허락해 주시는 범위 내에서 감동을 얻게 될 뿐, 인간이 그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거나 그러한 요소를 인위적으로 포함시켜서 예배 후에 예배자들로부터 “그 예배 좋았다!”라는 반응을 얻어내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잘못된 예배는 어떻게 하면 회중에게 흥미로운 예배를 보여줄 것인가에 온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 어긋나는 인본주의로 흐르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항상 예배는 인간보다는 하나님을 지향해야 그것이 복음적인 바른 예배가 될 수 있다.
문화가 바뀜에 따라 기독교 신앙의 형태나 전통은 일부 변화된 문화를 수용하지 않게 되면 사회와 지나친 괴리 현상을 경험하게 되고 교회는 사회로부터 고립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황화된(contextualized) 예배는 진리가 왜곡될 수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들은 문화에 대한 분명한 입장과 통찰력을 가져야 함과 동시에 전통이라는 범위를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문화가 바뀌었기 때문에 전통은 해체되고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어떤 경우에도 문화를 우위에 두는 시도는 진리와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다. 가시적이며 외형적인 형태의 변화만을 초점으로 할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예배는 예배와 프로그램의 경계가 약화되어 가고 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고 프로그램을 프로그램답게 실행함으로써 그 분위기와 성격을 명확하게 가름해 주는 것도 목회자의 책임이고 임무이며 신자들을 바르게 교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목회자가 이러한 명확한 구분을 지어주지 않으면 포스트 모던시대에 예배의 해체를 가속화시키는 것이 될 수 있다.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으로 즐기는 것은 아무 것이나 다 예배가 될 수 있다는 위험한 사고를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전통적 예배형태가 사도적 예배와 전적으로 동일한 형태라고 할 수는 없으나 사도적 예배와 초대교회 그리고 교부들과 종교개혁적인 예배전통에 근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본질은 변해서는 안 되지만 복음을 전하는 형식은 가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에 입각하여 예배의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며 다소 강조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다면 형태를 수정하는 방법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적 발산과 정서적 자극을 받는 하나의 방편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바르지 않은 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예배는 순서 하나하나가 예배에 합당한 신령한 순서가 되어야 하며 위엄과 경외심으로 충만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