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저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해 주옵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아멘!
위의 시는 ‘작은 프랑스인’이란 뜻의 프란시스코(Francis of Assisi)라 불려진 지오반니(Giovanni/1181-1226)의 ‘평화의 기도’로 잘 알려진 기도문이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쾌락을 추구하는 방탕한 삶을 살다가, 전쟁과 질병을 겪으면서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이후 가난과 겸손의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위의 기도문은 프란시스코가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1912년 프랑스의 가톨릭 잡지인 La Clochette에 익명으로 실린 것이 최초의 기록이며, 원제는 ‘Simple Prayer’였다. 이 기도문이 당시의 신앙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회람되며,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란시스코와 연결되었다. 왜냐하면 기도문의 내용이 프란시스코의 삶과 정신을 깊이 반영할 뿐만 아니라, 당시 프란시스코는 평화와 가난, 겸손의 상징으로 널리 존경받던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 기도문은 영어로 번역되며 “Prayer of Saint Francis”가 되었고, 이 기도문의 진정한 기원과는 상관없이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기도가 되었다.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사이트에서 확인한 바로, 국내에서는 최초의 발행인지 확인할 순 없지만, 1989년에 발행된 이 기도문의 악보(제목: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교단 총무와의 대화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부를 노래가 있어야 하고, 흔들 깃발이 있어야 한다.” 조금 더 명확하게 한다면 “함께 부를 노래가 있고, 함께 흔들 깃발이 있어야 공동체 안에 정신이 깃들고, 목표를 향해 함께 성장(전진)할 수 있다”.
80년대 말 그리고 90년대 초, 한국교회가 함께 불렀던 노래가 어쩌면 ‘평화의 기도’다. 삶은 힘들었고, 사회는 혼란했다. 대학가는 온통 최루가스로 뒤덮였고, 군화발의 울림은 정의와 자유를 부르짖던 젊은이들의 마음을 옥죄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함께 부를 노래가 있었고, 함께 흔들 깃발이 있어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다. 그 시절 한국교회도 복음의 깃발을 부흥이라는 열망으로 함께 흔들었고,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를 노래하며 상처 난 세상을 끌어안았다. 우리는 오늘 그때처럼 교회가 함께 부를 노래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노래를 교회 안에서 부르고 있는가?
“Happy-Holidays”
미국의 관공서에서는 성탄인사를 Merry Christmas나 Happy Christmas가 아닌 Happy Holidays로 사용하기를 권장한다고 한다. 종교적 편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어불성설이다. 성탄절인데 말이다.
“Merry Christmas”는 그날의 기쁨과 즐거움을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 두는 것이다. 반면 “Happy Holidays”는 그 중심에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예수 탄생은 차치하고, 자신의 즐거움을 앞세우는 이런 인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TV 공영방송의 광고에서 흔하게 듣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교회는 예수 탄생의 진정한 의미를 성탄절에 교인들과 나누고 있는가? 우리 또한 나 중심(인간 중심)의 성탄절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기쁨으로 나의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진 성탄절 말이다.
X-mas
위를 읽어보라! 우리 중 십중팔구는 ‘엑스마스’라고 읽을 것이다. 여기서 ‘엑스’는 무슨 뜻인가?
다음의 상징을 보라!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좌측에 있는 글자 α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자음 알파(Alpha)다. 이는 성경에서 처음 또는 시작을 의미한다. 우측에 있는 글자 Ω는 그리스어 알파벳 마지막 자음 오메가(Omega)다. 이는 성경에서 마지막 또는 마침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니라.
알파와 오메가 사이, 처음과 마지막 사이, 그리고 시작과 마침사이에 있는 상징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중앙의 아이콘(Icon)은 영어로 PX(피엑스)라고 읽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로 Χριστοs(크리스토스)라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X-mas는 Christmas(크리스마스)라고 읽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X’는 Χριστοs(크리스토스), 즉 Christ(크라이스트)인데, ‘mas’는 무슨 의미인가?
mas는 라틴어 Missa(미사)에서 유래한다. Missa는 보냄, 또는 파견을 의미한다. 이는 초기 기독교에서 성찬례 후 성도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의식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이것이 고대 및 중세영어에서 Mass로 받아들여졌고, 의미도 조금 변형되었다. 원래는 보냄, 또는 파견을 의미했던 용어가, Mass가 되면서 ‘성찬예배’라는 의미로 축소 고정되었다. 이것이 다시 mas로 축소되어 Christmas에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Christmas에서 ‘mas’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찬례를 지칭하는 것이 된다.
이상의 관찰에서 Christmas는 성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건하게 기념하는 날이며, 또한 mas의 어원에 따라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의 날이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성탄절에 베푸는 성찬으로부터 멀어져있고,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의 다짐으로부터는 훨씬 더 멀리 떨어져있다.
이제껏 우리에게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관련한 날로써 ‘기념과 기쁨’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예수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라틴어의 Natalis나 프랑스어의 Noel, 이탈리아어의 Natale, 스페인어의 Navidad, 독일어의 Weihnachten 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성탄을 단순히 예수의 나심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파견 또는 파송이라는 의미에서 Christmas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 첫 의미는 ‘그리스도의 파견’이다. 구약의 여러 언약하신 말씀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파견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초림과 복음의 시작(막 1:1-2)이라 명명할 수 있다. 그러나 Christmas는 초림과 복음의 시작, 즉 그리스도의 파견만으로 그 의미가 충족되지 않다.
두 번째 의미는 ‘성도의 파견’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 속에서 시작된 복음은 우리 안에만 머물 수 없다. 우리에게 다다른 복음은 다시 누군가에게 복음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위임과 파송을 받았다(행 28:20). 이것은 복음 전파에 관한 단순한 위임을 넘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두 번째 세례 요한의 사역이다.
그래서 세 번째 의미는 다시 ‘그리스도의 파견’이 된다. 물론 초림이 아닌 재림이고, 복음의 시작이 아닌 종결 곧, 심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의 수용과 거부는 심판의 기준점이 된다(요 1:5).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생각해보자! 2024년 성탄절을 기념과 기쁨의 절기로 보낼 것인가? 물론이다. 성탄절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기념과 기쁨의 절기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것을 넘어서야 한다. 매년 돌아오는 성탄절은 기념과 기쁨의 절기를 넘어 위임과 파송의 절기가 되어야 한다. 내 삶에 직접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된 복음을 나의 것으로만 감추어 두지 않고, 누군가의 삶에 복음이 시작될 수 있도록, 위임과 파송의 사명을 확인하고, 그렇게 살기를 다짐하는 절기여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탄절을 위임과 파송의 절기로 보낼 수 있을까? 누가복음 2장 14절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글을 열며 언급한 프란시스코의 기도처럼,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를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 고백이야말로 한국교회가 지금의 혼란한 세대를 향해 함께 부를 노래이고, 함께 흔들 깃발이다! 그리고 2024년 성탄절을 예수 탄생의 기념과 기쁨만으로 끝내지 않고, 위임과 파송의 날로 인정함으로, 성탄은 이천여년전 있었던 과거의 사건의 아닌, 오늘 이곳에서 다시 고백되고, 다시 실행되는 하나님의 언약이 될 것이다.
임시영 목사 [신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