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 교수(성결대학교 신학부·신약학)
우리가 사는 사회를 시민사회라고 한다. 시민사회란 정부와 시장의 영역과는 다른 제3의 영역으로서, 시민들의 자유로운 참여와 결속, 토론과 합의가 일어나는 곳이다.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그곳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가치를 토론하고 실천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본질적으로 그 능력으로 역사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가치를 통해서 사람들의 삶에 더 쉽게 접근하고 그들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핵심가치란 사랑과 정의, 평화 생명의 보존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개인이 향유할 수 있는 가치이기도 하지만, 공적인 성격을 갖는다. 최근 신학적 주제로 떠오르는 이른바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의 근거를 제시하라면, 나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를 들겠다. 여기서 ‘생활하다’는 단어는 도시국가를 의미하는 ‘폴리스’(polis)에서 나온 동사 ‘폴리튜에인’(politeuein)이 사용된다. 그러니까 그것을 문화적 문맥에서 적확하게 번역하자면, ‘복음에 합당한 시민생활을 하라’는 뜻이겠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인가? 빌립보서만을 보아서는 알 길이 없다. 사도행전 16:16-40에 보면 바울일행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시 당국자들이나 시민들과 겪는 갈등과 법적인 문제를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바울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어린 무녀(巫女)를 고쳐주게 된다. 그런데 바울은 마지못해 그 아이를 고쳐주는 듯이 보인다. 왜 그랬을까? 바울은 이 일로 말썽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것 같다.
이 무녀는 아직 어려서 주인에게 예속되어 훌륭한 돈벌이 수단이 되고 있었다. 그러니 만일 무녀가 예수의 영을 받아 늘 하던 예언을 멈추게 되면, 주인이 손해를 볼 것은 자명했다. 결국 이 주인은 바울일행을 그 도시의 광장 ‘아고라’(행 16:19 “장터”=오늘날 ‘시청앞 광장’)로 데려가, 로마의 “풍속”(규범)과는 다른 것을 유포한다고 무리들을 선동하고, 재판도 없이-아마도 관리들을 매수해-바울일행을 감옥에 집어넣는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불법이요 폭력이었다. 바울은 재판 없이 투옥된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자, 관리들은 슬그머니 무마시켜 바울을 석방하고, 그 곳을 떠나게 하려했다.
여기서 우리는 빌립보의 여론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먼저, 여론은 우여곡절을 거쳐 무녀를 이용하여 돈벌이를 했던 주인보다는 그녀를 고쳐준 바울일행에게로 기울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바울일행이 로마시민이라는 말에 관원들은 슬그머니 그들을 놓아주려고 하였다. 여기서 큰 몫을 한 것은 바울일행의 행동이었다. 바울은 감옥에서 일어난 놀라운 기적 때문에 자살을 감행하려던 감옥의 교도관을 말려 구하고, 감옥 문이 열렸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탈옥할 수 있는 죄수가 도망하지 않고, 도리어 자살하려는 교도관의 생명을 살렸다!’ 요즘 같아서는 인터넷을 통해 즉시 퍼져나갈 감동적인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바울은 불법적인 관원들의 사과를 받아내고서야 ‘당당하게’ 감옥을 걸어 나갔으니, 이런 소문이 왜 빌립보의 아고라에 전파되지 않았겠는가? 인간에 대한 복음의 근본가치를 표현하는 바울의 행동의 진정성이 입증된 셈이다. 그것은 이 도시에서 새로운 “풍속”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가치를 실행하는 바울의 태도는 참으로 ‘공적’이었다. 이렇게 빌립보의 작은 가정교회는 이 도시사회의 긍정적인 여론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영향력 있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개신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이제 흔히 듣는 말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개신교가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당이 그 기본가치인 공익추구를 포기하기 때문에 신뢰를 잃어가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국민들은 교회라는 이미지에서 ‘세상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교회’를 떠 올린다. 사실, 교회는 이익을 바라지 않고 많은 선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는 종교단체로서 교회에게 비영리 단체 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목회자나 교회의 토지에 세금을 전부 혹은 거의 부과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국가와 국민은 이미 교회의 공공성을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교회에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현실적으로 부동산을 늘리는 ‘사업’에 몰두한다면 더 이상 그 혜택을 받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공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교회가 마치 개인의 소유인 것처럼 ‘물려줄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면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오늘 기독교 위기의 본질은 단지 교회성장의 위기가 아니라, ‘복음의 공공성’을 상실하고 있는 신앙의 위기일지 모른다. 요컨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인 복음과 교회, 교육기관을 사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려 자기만족과 이익을 삼아, 그 거룩한 가치를 손상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자는 말이다.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공공성을 잃은 우리의 생활방식을 깊이 성찰하고 ‘공적인 복음에 합당한 시민생활’로 스스로를 훈련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