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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AI의 미래
기독교와 AI의 미래
2025-09-12 오후 1:48:00    성결신문 기자   


지난 2024년 열린 한국기독교공동학회의 주제는 “AI와 기독교의 미래”였다. 이 주제어는 표현이 잘못되었다. 학회의 주 관심사는 본격적인 AI 시대에 교회가 어떻게 잠재적 위험에 대비할지에 대한 염려와 어떻게 기술을 잘 활용한 효율적 목회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늘 신문명과 기술에 대해 이런 양면적 태도를 취해 온 것이 사실이다.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여기에서 주도권은 AI에 있다. 하지만 기술은 늘 올바르게 발전하고 있는가? 기술에 대한 교회는 그 주도성을 포기하는 것인가? 그래서 학회의 주제는 AI와 기독교의 미래가 아니라 “기독교와 AI의 미래”였어야 한다. 

AI의 무분별한 개발과 발전을 경계하며 그 적절한 발전의 방향을 위해 교계가 기술 윤리와 개발의 적절한 방향을 제안하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기술은 단순히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에 그치지 않으며 인간 삶의 맥락을 바꾸는 중요한 요소이다. 

교회는 이 거대한 문명의 흐름 앞에 어떻게 교회 안과 밖에서 적절한 논의를 주도할 수 있을까?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교회는 기술 담론에 어떻게 참여하며 그 흐름의 파트너로서 주도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렵지만 매우 시급한 과업의 기로에 서 있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세기의 격돌이 시작될 때 언론은 기계가 바둑에서 인간을 능가할 수 있을지 의심하였다. “완벽한 정보를 갖고 있는 모든 게임은 각 지점에 최적의 가치 기능을 갖고 있다.” <네이처>지에 실린 구글의 논문 첫 문장은 알파고의 중점적 기능의 핵심이 담겨있다. 

인공지능은 여전히 컴퓨터의 연산기능 강화학습의 수학적 결과이다. 이전 체스와 퀴즈쇼의 사례와 달리 바둑은 무수한 경우의 수에 따른 변수의 폭이 단순 연산으로 커버하기는 어렵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알파고가 세 판을 내리 승리하자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되고, 오히려 인간이 기계의 엄청난 능력에 도전하는 모양새가 됐다. 

인공지능은 단순 연산을 넘어 ‘심층신경망’을 통한 강화학습을 통해 데이터에 기초한 탁월한 직관력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당시 구글 인공지능팀이 바둑에 집중한 이유이다. 이 대국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미래 삶에 불러올 변화를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인공지능은 인간 중심의 사회 구조와 산업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인간의 미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많은 영역에서 인간의 역할은 인공지능이 대신할 것이다. 위험한 일과 정교한 일을 대신 해주는 긍정적 차원과 인간의 역할을 잠식해 인간이 오히려 소외될 것에 대한 우려가 공존한다. 상당수 기업이 이미 공개채용에 인공지능 면접을 활용했고, 공교육에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가 도입되었다. 

이전 산업혁명이 인간의 육체노동을 잠식하며 심각한 실업난을 불러왔듯이, 인공지능과 사이버 프로그램은 이제 인간의 정신적 기능을 대체하고, 심지어 소외된 인간의 정서적 만족의 부분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기계의 인간화 못지않게 자주 회자 되는 개념은 바로 ‘인간의 기계화’이다. 휴머노이드와 사이보그 논쟁이 그 예이다. 즉 과학의 도움으로 인간은 기계와 결합하면서 생물학적 개념을 초월한 ‘트랜스휴먼’ 또는 ‘포스트휴먼’으로 급격한 진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한 신학 수업에서 학생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도대체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이라는 정통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고전적 명제는 문장 자체 안에 논리적 역설을 내포한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아리우스 논쟁과 인성 문제로 인한 네스토리우스 논쟁은 초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신학 논제였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이제 새로운 신학적 논의를 요청한다. 

“도대체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사이보그 메니페스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시대, 이 신화적 시대에 우리는 모두 키메라들, 즉 이론화되고 가공된 기계와 유기체의 혼종들이다; 우리 모두는 사이보그들이다. 

사이보그는 우리의 존재론이다.” 그의 말처럼 기계와 네트워크로 탄생한 포스휴먼 시대에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점차 모호해진다. 이제 기독교 지성이 마주한 가장 심각한 논의는 ‘신 존재 증명’에서 ‘인간 존재 증명’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논의를 뜨겁게 만드는 일본 만화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1995)이 있다. 이 작품이 제기한 철학적 문제의식은 지금까지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명작으로 추앙되도록 만들었다. 제목이 말하는 두 단어, ‘고스트’는 인간의 자아와 정신을 의미하며, ‘쉘’은 인간의 육체 또는 기계화된 장치를 의미할 것이다. 

즉 원작이 관객에게 제기한 질문은 ‘인간다움’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모든 특성을 기계가 대치할 때 인간 됨의 본질은 무엇인가이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된 자아를 꿈꾸었다면(고후 5:17), 현대 문명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탈육화한 새로운 피조물로 진화되길 소망한다. 오늘날 인간은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하기보다 기획되고 변화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다. 서브젝트(subject)가 프로젝트(project)가 되었다. 

이것을 흔히 동력혁명, 정보화혁명을 넘어선 제3차 미디어 혁명으로서의 ‘이식혁명’이라 부른다. 의학의 발전과 함께 신체는 기계와 결합하고, 정보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정신은 컴퓨터나 인터넷과 연결된다. 나아가 생명공학을 통해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종으로 진화되길 원한다. 

<공각기동대>의 주인공은 바로 그 인간다움의 고유성에 대해 질문한다. 만일 그 인간성을 인간 안에 유추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그것을 찾아야 할까? <공각기동대> TV 시리즈인 <Stand Alone Complex>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전차로봇이 자신을 희생해 숭고하게 자폭하면서 신의 이름을 부른다. 이 인공지능이 마침내 소유하게 되는 ‘고스트’, 즉 참된 인간성을 사이보그화된 인간은 점차 잃어버린 것은 아닐지 고민해 본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여 “이 땅을 다스리게 하자”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신의 형상이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 인간만의 특별한 능력과 성격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인간은 신의 그 창조력을 모방한다. 인간성이라 할 수 있는 지성과 직관, 그리고 감정을 기계에 불어넣어 자신의 분신을 창조하고 그 피조물로 이 땅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다스릴 수 있기를 원한다. 

우리는 인간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이 특별한 피조물에 감탄하지만, 이런 성취감은 이제 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에게 반역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마치 인간이 태초에 그러했듯 말이다. 헐리우드 SF 영화의 분위기는 1990년대 들어 기계에 의해 인간의 소외와 멸망을 다루는 작품들이 더 많다. 즉 미래는 아주 발전되고 편리해지지만, 인간은 더 불행해지거나 멸망할 것이란 묵시적 상상을 담아낸다.

독일의 사회학자 율리히 백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에서 우리 사회는 이미 인간의 통제력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잠재적 위험 속에 놓여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인간의 기술에 대한 윤리와 책임이 더욱 중요하다.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간은 정말 더 행복해질까? 첨단과학의 시대에 종교와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염려와 비판의식으로 문명을 거부하는 이원론적 태도는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빗이 지적한대로 ‘하이테크’ 시대에 사람들은 ‘하이터치’를 열망한다. 인공지능의 첨단 과학기술은 오히려 인간 스스로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더 깊은 각성을 불러오며 종교적인 담론과 관심이 증폭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인간 문명의 진화는 일종의 신 따라하기가 아니었을까? 즉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점차 신처럼 되고자 노력해 왔다. 인간은 지식의 확장을 통해 ‘전지’하려 하고, 기계장치를 통해 신체적 한계를 확대해 ‘전능’하길 원한다. 정보-통신 혁명을 통해서는 세계를 연결해 ‘무소부재’하려 하고, 의학과 생명공학을 통해 ‘영원불멸’하길 꿈꾼다. 더 나아가 생명의 창조와 이 땅에 천국같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노력해 왔다.

종교는 과학기술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과학적 호기심과 발전이 무분별한 진로로 가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들은 열린 마음으로 과학과 대화하며 그 최선의 방향을 제안하고 이끌어야 한다. 기술이 이 세상을 섬기는 인간의 좋은 파트너이며 창조주의 선한 청지기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기술 공학 못지않게 기술 윤리가 강조되는 이유이다. 좀 더 실천적인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판단을 누가 관리하고 어떻게 운용하느냐의 문제이다. 결국 ‘인간 vs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활용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는 소수의 사람과 그들에게 종속되는 인공지능 없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현재 많은 나라에서 시급하게 AI 윤리 규정을 마련하고 있다. 이 과제에는 과학자뿐 아니라 정치인과 철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교회도 보다 적극적으로 AI의 올바른 미래 방향을 제시하는 기술 윤리와 정책 토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AI의 미래를 선도할 시대적 사명이 있다는 말이다. 그 사명은 AI 기술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인류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랑을 기초로 한 공동체 의식을 발휘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은 신이 부여한 창의성으로 인간이 만들어가는 콘텐츠이며, 동시에 인간이 살아가는 콘텍스트이다. 인간은 문화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인간에게 문화는 자연을 토대로 한 “제2의 환경”이다.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훼손하고 오염시켰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돌보고 가꾸라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문화는 타락보다 앞서며 문화의 기원은 창조에 있다. 

태초의 문화 명령은 첨단과학의 시대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여전히 교회는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생명에 대한 관심과 이 땅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는 문화적 사명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기술은 그런 인간 소명의 파트너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말씀하신 두 명령어에 주목해 보자. “생육하라(살아라)”라는 축복과 “다스리라(살리라)”는 사명은 곧 생명에 관련되어 있다. 이는 여전히 교회의 최우선 관심이어야 한다. 과학적 호기심과 발전이 무분별한 곳으로 질주하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들은 열린 마음으로 과학과 대화하며 최선의 방향을 제안하고 기술을 이끌어 가야 한다.

윤영훈 교수 [성결대학교]
기자 : 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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