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예수께서 생의 마지막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고 우시는 장면이 나온다(눅 19:28-44). 그곳을 기념해서 지은 눈물교회가 남아있다.
거기서 보면, 예루살렘 황금 돔 사원을 중심으로 전체가 보인다. 예루살렘은 그 이름에 평화를 의미하는 ‘살렘’이 들어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랍어로도 ‘평화’는 샬롬과 같은 어근을 갖는 ‘쌀람’이다.
팔레스타인은 고대로부터 분쟁지역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로마 문명과 이집트 문명,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을 잃는다는 것은 앞마당을 내주는 격이었다. 각 문명의 지배자가 영토를 확장하려 할 때마다 이곳을 거쳐 가야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을 정벌할 때만 해도 이 땅의 해안 길을 7번을 지나야 했다.
그래서 이 분쟁지역의 땅이름은 지금도 분쟁 중이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가 지배할 때는 ‘예후드’, 3세기 헬레니즘 왕국의 지배할 때는 ‘유대아’, 그러다가 기원후 66년 로마에 대한 유대인 봉기가 일어나 로마는 성전을 거의 파괴하고, 지금은 이스라엘 영토에 속한 성전의 서쪽에 이른바 ‘통곡의 벽’만이 남아있다. 132년 ‘바르 코흐바’를 필두로 제2차 유대인 봉기가 일어나자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을 그 땅에서 완전히 추방하며, 이 땅의 이름을 성경에서 이스라엘인들이 가장 혐오감을 가졌던 ‘블레셋’, ‘필리스티네’를 사용하여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곳을 이스라엘 땅이라고 부른다.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
그러니까 기원전 3세기 초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이 사건으로 기원후 2세기 초부터 그 땅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었고,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 즈음에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상들이 쫓겨난 땅을 다시 찾아 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이 일어난다. 당시 팔레스타인과 중동지대는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나중에는 오스만 제국까지 합세하고 이에 대항하는 연합국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였다. 그런데 영국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후세인-맥마흔 협약(1915)’을 맺는다. 이 땅에 국가를 건립할 수 있게 해줄 터이니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라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몇 년 후 이번엔 유대인과도 협약을 맺어 국가를 건설해주기로 약속한 데 있었다. 이것이 ‘벨푸어 선언(1917)’인데,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설적인 유대인 거부 로스차일드 가문의 돈이 필요했던 영국의 궁여지책이었다. 당시 6조 원 정도라고 하는데, 이걸 현재 시가로 계산해 보면 5경 정도가 된다고 한다.
유대인은 시오니즘 바람을 타며 국가건설의 희망을 품고 땅을 사서 귀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팔레스타인에 이주하는 유대인과 정착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인들과 충돌이 시작되어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진다. 유명 유투브 세계사 강사 이다지는 이 상황을 한방에 이렇게 정리한다.
“영국의 사기 분양에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걸려든 셈이다.” 하여간 1차 세계대전 이후 2차 대전까지 팔레스타인은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다.
1948년 현대 이스라엘 건국 직전까지만 해도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 인구는 불과 2~3%밖에 안 되었다. 그러다가 2차대전이 일어나고, 1947년 유엔은 영국 위임통치령 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과 아랍인 두 지역을 약 55:45로 나눠서, 국가가 건설되는 중재안을 내세웠다.
그러다가 1948년 이스라엘이 먼저 국가 건립을 선포하자, 이스라엘을 대항해 범아랍연맹이 먼저 공격하자 1차 중동전쟁이 벌어지고, 유엔 안(安)대로 이스라엘은 거의 절반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1967년 이스라엘은 이른바 6일 전쟁을 통해서 지금의 가자지구와 요르단 서안 지구까지 병합하고, 팔레스타인 난민의 거주지를 이곳에서 제한하고 총 약 770km에 8M 높이의 분리 장벽을 세우고 내부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그리고 이곳마저도 이스라엘인 정착촌을 건설하며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계속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1993년 빌 클린턴의 중재로 오슬로 협정이 극적으로 체결되어 해결의 실마리를 얻는 듯했다. 서안 지대에서 이스라엘군을 철수시키고, 이 분쟁지역에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두 개의 국가를 세우는 협약에 서명하였다. 이대로만 된다면 정말 중동평화가 정착될 수도 있는 협정이었다. 문제는 일부 강경파였다.
이 협정을 끌어낸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 해방국가 아라파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곧 극우파에 의해 라빈 총리가 암살되었다.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강경파 네타냐후가 30대에 총리로 당선되지만, 그는 미국의 압력으로 평화협정에 서명한 이유로 다시 총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가 2009년 다시 집권한 후 분쟁이 격화되면서 오슬로 협정은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웨스트 뱅크에서 이스라엘군은 아직도 완전히 철군하지 않고 계속 정착촌을 건설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키며 땅을 점령해 들어가고 있다. 반면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 무장저항 세력으로 저항하며, 지금과 같은 분쟁과 테러, 그리고 전쟁으로 끊임없이 분출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분쟁과 갈등은 결국, 땅의 소유권 문제인 셈이다.
이 분리 장벽 안에는 해마다 이스라엘 정착촌이 건설되어 지금까지 220곳에 53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양측 주민들의 국경 없는 분쟁으로 총성과 방화, 싸움 반평화가 일상이 되고 있다. 점령지 내에 팔레스타인 마을 사이에 정착촌이 건설되면, 그 경계에 철조망을 치고 이스라엘군은 총을 들고 경계를 선다.
팔레스타인 주민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처음에 살던 땅에 이주해 와서 조금씩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더니 어느 날 반을 가져가고, 이번엔 6일 동안 급습하여 이 분리 장벽으로 몰아넣더니, 이제 그 안으로 들어와 총칼로 경계를 서며 야금야금 땅을 빼앗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마을을 반으로 뚝 잘라 들어온 정착촌 진입로를 보면서, 정착촌에 국가가 제공하는 공공임대주택에 살면서 수영장 딸린 저택에서 받아 바비큐를 굽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또 아침마다 검문소를 통과해서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보면서 어떻게 저항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오랜 상황을 살아내 한 팔레스타인 할아버지는 이렇게 절규한다.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냐! ... 우리도 인간이다!” 사실 평화를 사랑하는 평범한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 상황은 그저 어서 속히 끝나기를 바라는 일상일 뿐이다. 이렇게 약 75년간 원수 사이가 된 이들 모두는 샬롬과 쌀람을 갈구하고 있다.
■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나는 이 복잡한 현대 중동 문제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어서, 국제정치적 견해를 피력하지 않겠다. 다만 그런 행동을 해 온 ‘국가 이스라엘은 야곱인가 이스라엘인가?’라는 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스라엘은 야곱을 대신해서 야웨 하나님이 바꾸어준 이름이다. 원래 이름 야곱의 뜻 “누구와 싸우다”에서 이스라엘, 즉 ‘신이여 야곱을 위해 싸우소서!’라는 뜻으로 변한 것이다.
창세기 이야기에 의하면, 야웨는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야곱을 도와주시고 그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야곱이 부당하게 에서를 속였을 때, 야웨는 야곱을 위해서 싸우지 않는다. 그리고 야곱이 자신의 오랜 잘못을 내려놓고 형에게 진실과 잘못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누구를 위해서도 싸우지 않았다.
싸움이 아닌 평화를 주었다. 피가 아닌, 눈물을 주었다. 이런 관점을 우리는 혈육 혹은 동족의 관계에서나 가능하다고 읽어야 할까? 역사상 분쟁과 전쟁의 비극은 내전에서 가장 처참하게 일어났다. 그럼 다시 물을 수 있다. 현재의 국가를 이루어 팔레스타인과 이 소용돌이를 지나고 있는 유대인에게, 이 전쟁은 야곱이 자신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전쟁인가? 아니면 야웨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전쟁인가? 아니, 지금 이 전쟁을 수행하는 지금 유대인은 ‘야곱’인가 ‘이스라엘’인가?
지금 전 세계는 이른바 ‘반유대주의’의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다. 반면 한국은 오랫동안 반유대주의의 무풍지대였다. 도리어 이스라엘은 분단된 우리 민족발전의 모델이 되어 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새마을 운동의 모델로 국무위원들이 집단으로 키부츠를 방문했다.
한 손에 망치 들고, 한 손에 총칼 들고 싸우는 이스라엘! 그리고 유대인 부자학, 유대인 교육법, 그리고 1980년대부터는 성지순례로 그러한 분위기는 정치와 종교 영역에서 이어져 왔다. 태극기 부대에 성조기와 함께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하게 된 내력이 거기에 있다.
과연 지금의 이스라엘이 성서에서 요구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인가를 분별해야 하겠다. 이스라엘이 국가의 정체성을 구약에 두고 있고, 땅도 구약에 언약 된 조상들의 땅이라고 확신하여 지금 이렇게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면, 그 행동 역시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에서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침입을 받았을 때, 자신들의 삶이 공의의 하나님의 잣대에 어그러져 있는지를 심각하게 성찰했고, 공의가 무너진 세계와 인간은 비록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공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예수께서는 어그러진 이스라엘을 향해 탄식하신다. 무엇을 내다보셨을까? 기원후 66년 발발한 유대전쟁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은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로마군은 예루살렘은 완전히 포위하고 강력하게 진압한다. 그때 파괴된 성전은 2000년이 지난 지금 통곡의 벽으로 유대인들에게 남아있다.
마지막 저항군이 모인 곳인 마사다에서 로마군은 저항군을 완전히 섬멸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유대인 평화주의자 예수에게 배워야 했고, 지금도 배워야 할지 모른다. 그들은 어쩌면 다시 그때 그 약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유럽이나 미국과 같이 기독교를 국가나 삶의 기반으로 삶는 나라의 국민과 정치가들은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폐기 처분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기독교 복음은 그들 국민이 살아가는 윤리의 근간이요, 용서와 화해로 과거의 상처와 기억을 치유하는 영원한 평화의 패러다임임을 명심해야 한다.
■ 이스라엘의 고난
그렇다면 국가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거칠고 민감하게 되었을까? 자신들이 겪었던 고난의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사회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지금 유대인들이 이슬람인을 겨누고 있는 칼날은 기독교의 반유대주의라는 독버섯에서 자양분을 공급받아 더 날카로워진 칼이다.
유대인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벽에 기대어 절망하며,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정당하신가?”라고 울부짖어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난을 이사야 53장의 ‘인류를 위한 고난’으로 읽을 만큼, 고난은 깊었고 성찰은 숭고했다.
사실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전쟁과 분단,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어떻게 인류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나무라는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정체성을 심을 수 있을까를 고뇌할 것이다. 저 기나긴 반유대주의 역사에서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유대인 랍비, 요나단 섹스의 글을 인용해 본다.
나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이기에 조상들의 눈물과 고통을 뼈저리게 느낀다 … 그들의 눈물은 유대인의 기억, 다시 말해 유대인의 정체성에 깊이 새겨 있다. 내가 어찌 내 영혼에 쓰인 고통을 놓아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한다. 내 자식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자식들의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과거의 증오 위에 그들의 미래를 세울 수는 없으며, 그들에게 사람들을 덜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나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 내가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조상들에게 빚진 의무는 더 이상 신앙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과거를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서 배우기 위해 과거를 존중한다 … 우리가 증오에는 사랑으로, 폭력에는 평화로, 원한에는 관대한 마음으로, 갈등에는 화해로 응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의 눈물은 어떤 눈물일까? 아마도 이런 화해와 평화의 마음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에 내릴 무거운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면서 흘리신 눈물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이스라엘인으로서의 눈물, 아니 더 나아가 그런 높은 자의식으로 살아야 하는 ‘책임적 이스라엘’을 깊이 사랑하는 눈물이 아닐까? 지금 팔레스타인에는 묵묵히 평화를 지지하는 이스라엘 시민들이 많아져야 한다.
얍복 나루에서 피가 아닌 눈물을 주셨던 야웨 앞에, 이제 싸움을 내려놓고 묵묵히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고대하며 자신도 그를 두려워하며 행동하는 ‘변화된 야곱’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를, 그리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유대인을 이토록 거칠고 황폐하게 만든 국가와 사람들이 진정 평화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고대하고 기도해야 하겠다.
이 글은 필자와 강슬기가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을 받고 공동연구한, 『마카비혁명에서 3·1운동까지: 종교 민족주의에 구현된 기독교 평화』(감은사, 2024)의 머릿말에 게재된 글이다.
박정수 교수 [성결대학교 신학대학 신약학 / 신학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