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11월 2일부터 11일까지 송창엽 목사를 비롯해 14명의 목회자 및 성도가
이집트·요르단을 순례한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편집자 주>
인천에서 에티하드 항공을 타고 야간비행으로 당일 낮 카이로에 도착했다. 카이로에 도착하자 입국장에서부터 준비된 입국 가이드가 우리를 맞아 입국심사 및 수화물 찾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이렇게 이집트와 요르단의 경우는 공항이나 주요 국경에 입국 가이드가 심사장까지 들어와 입국 수속을 돕기에 쉽게 입국할 수 있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우리를 맞이하고자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설레는 마음으로 짐칸에 짐을 싣고 버스에 올랐다. 드디어 지금부터 2025년 성지순례가 시작이 되었다!
우리는 공항에서 올드 카이로로 첫째 날 일정을 소화하러 갔다. 처음 도착한 곳은 이집트 박물관이었다. 우리가 도착할 당시 이집트 그랜드박물관은 아직 개관 준비 중이어서 많은 유물이 그곳으로 옮겨져 있었지만, 우리가 꼭 보고자 했던 것은 ‘메르넵타흐 석비’이다.
이 석비는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 메르넵타흐의 승전을 기념한 석비로, 기원전 13세기 말에 제작되었다. 이 비문은 가나안 지역의 정복을 기록하며, 성경 외의 다른 사료중 ‘이스라엘’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이어서 성경의 사실성과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성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것 외에도 모세를 나일강에 띄웠던 갈대상자, 출애굽 당시 파라오와 관련한 유물들을 실제로 보며 성경 속 사건을 훨씬 더 실제적으로 그려 볼 수 있다. 박물관에 이어 우리는 아기예수 피난교회(아부사가르)를 방문했다.
이 교회는 1,500년 전에 세워진 콥틱 정교회로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난와 이곳에 머문 것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난온게 된 것에 대해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호 11:1의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원래 호세아서에서 “내 아들”은 이스라엘을 의미하지만, 마태는 이를 예수님으로 연결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출애굽의 역사를 몸소 다시 걸으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교부 이레니우스(2세기)는 “재현”이라 표현한다. 이 땅에 장막으로 오신 예수님이 출애굽을 재현하신 것은 복음이 유대 땅 성전에서부터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유대 땅을 넘어 열방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되게 한 것이며 옛언약 공동체(이스라엘)가 시작된 땅을 새 언약의 중심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밟으심으로 새언약 공동체(교회)로 다시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기예수 피난교회를 나오자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지도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콥틱 정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을 다니셨던 동선을 기록한 지도인데, 출애굽 당시 유대인이 밀집했던 고센 지역과 예레미야 때 남유다가 망한 뒤 애굽으로 흘러들어온 유대인들이 정착하며 세운 도시들을 예수님 가족이 다녔던 것을 볼 수 있다. 콥틱교회는 야곱가족이 정착하여 민족을 이룬 고센 땅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곳을 예수님이 다시 밟으신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를 쓰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 난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그들이 정착한 도시들에서 심판을 받았던 그 공간을 예수님이 방문하심으로 불순종의 자리가 순종의 자리로, 심판의 자리가 구원의 자리로 회복시킨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사 19장의 애굽의 회복이라는 예언이 씨앗처럼 시작된 역사적 사건으로 보았다.
마 2:13~15의 불과 세 구절이 이집트에서는 이런 많은 여정과 역사적인 의미, 메시지를 풀어낼 수 있다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은 역사의 씨줄과 날줄에서 너무나 오묘하고 치밀하신 것을 현장에서 다시한번 감탄하게 된다.
다음으로 아기예수 피난 교회에서 5분 거리 내에 있는 벤에즈라 회당을 방문했다. 벤 에즈라 회당은 출애굽 직전 모세가 이곳에서 감사제사를 드리고 출발했다는 전승을 가진 곳이다. 처음에는 콥틱교회였다가 9세기경 유대공동체에 매각해 회당이 된다.
19세기 후반에 이 회당 다락에서 9세기부터 19세기까지 천년 간 히브리어로 기록된 각종 문서들이 발견된다. 이곳 아프리카에서는 초대교회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헬라어로 된 70인역을 통해서만 성경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히브리어 문서의 발견을 통해 이곳에도 히브리어 원문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가 되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바벨론 요새를 갔다. 현지 가이드 말로는 벧전 5:13에 나오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와 마가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했을 때, 그 바벨론은 이곳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학계에서는 ‘소수설’이고, 로마를 상징적으로 바벨론에 비유한 것으로 보는게 ‘다수설’이다(이는 계시록에서 예루살렘을 애굽이라 부른 것과 같은 용례임).
이곳이 바벨론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여러 전승이 있는데, 느부갓네살 2세가 이곳을 정복하고 바벨론이라 불렀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요새는 AD.300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확장 재건된 것으로, 이 요새와 주변에 콥틱교회가 몰려있게 된 이유는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결의를 콥틱교회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박해를 받게 되자 이들의 피난처와 거점이 되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첫날 일정을 급하게 소화하고 우리는 숙소가 있는 뉴카이로로 향했다. 가는 도중 거리 곳곳에는 지붕 위에 십자가를 단 단층건물이 많이 있었는데, 교회가 아니라 무덤이라고 한다. 고대로부터 이집트인들은 부활을 믿었기에, 현재의 죽음을 깊은 잠에 들어간 것으로 본다. 그래서 미이라를 만들어 육신을 보존하였고, 또 죽은 자를 잠자는 자로 여겼기에, 죽은 자와 함께 생활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집이 없는 자들은 기꺼이 무덤을 집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들의 내세관으로 인해 독특한 주거문화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성지를 여행하며 얻게 된 새로운 경험이었다.
순례 2일차 우리는 지중해변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고대 지중해 최대의 항구이자 학문과 기독교의 중심지이다. 알렉산더 사후 이집트에 나라를 세운 프톨레마이오스는 이곳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파로스 등대를 세워 국제무역항의 위상을 세웠고, 또 지중해 지역 최대의 도서관을 세움으로, 학문과 철학의 중심도시로 자리잡게 된다. 무엇보다 헬라어 성경인 셉튜아진(70인역)이 이곳에서 출간하여, 히브리적 개념과 성경구조를 헬라 철학의 언어로 번역하고 해석하므로, 중간기와 신약시대 때 유대교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셉튜아진(70인역)이 만들어진 곳이라는 것 외에도, 마가의 순교와 초대교회의 박해 현장인 카타콤베가 있어, 성지순례에 있어서 중요한 곳이다.
로마의 박해 속에서 초대교회는 무덤을 자신들의 피난처이자 예배처소로 삼았다. 이는 로마에서는 무덤을 신성영역으로서 불가침 공간으로 간주한 것을 이용한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덤은 실제적인 신앙의 현장이었고, 하나님의 시간 속에 숨겨진 거처였다. 이곳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감추임, 비밀됨이라는 ‘게니자’의 의미를 다시한번 새겨볼 수 있었다.
우리는 다음으로 콥틱교회의 총대주교좌인 마가순교 기념교회로 향했다. 이곳은 사도 마가의 복음과 피, 순교의 씨앗이 뿌려지고 자란 곳이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마가가 AD.42년경 이곳에 복음을 전했다 하고, 콥틱전승에 따르면 AD.68년 부활절 기간 중 이교도들에게 잡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당시 이곳 알렉산드리아에는 수십만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있었다. 성막 구조에 익숙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에게 마가는 성막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방 땅에도 하나님의 장막이 펼쳐졌다는 복음을 전했다.
마가의 순교 위에 세워진 콥틱교회는 오늘날까지도 순교와 핍박 속에서 믿음의 유업을 지켜오고 있다. 제단 아래 지하에는 마가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어 계 6:9~10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순례 3일차 우리는 올드 카이로 외곽에 있는 모카탐 동굴교회로 갔다. 이곳은 1930~40년대 상이집트의 가난한 콥틱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카이로로 올라와 쓰레기 적치장에 들어오며 시작된다. 이후 1970년 경 기자 지역에서 강제퇴거를 당한 콥틱인들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기회를 얻지 못하고, 더럽고 위험하며 멸시받는 직업에 내몰려 사회적 분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놀라운 것은 1세대들은 선택권이 없는 상태에서 쓰레기 마을로 쫓겨 갔지만, 2-3세대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약사, 의사, 변호사 등 중산층 직업을 갖게 되었음에도 공동체와 교회를 떠나기 싫어, 정말 신앙의 자유를 위해 계속 이곳에 머물거나 동네와 긴밀히 연결된 삶을 살고 있다. 그렇기에 현재의 모카탐 교회는 이집트에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쓰레기 더미에 거하기를 선택하는 신앙(시 84:10)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들의 거주지역은 도로나 기반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못해, 작은 미니버스로 갈아타고 들어갔다. 마을입구부터 역한 쓰레기 냄새가 시작된다, 안쪽 교회에 내렸을 때, 교회 주변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지만 이곳 산 전체에서 풍겨지는 쓰레기 냄새는 여전히 속을 뒤집었다.
이들이 하루 종일 쓰레기를 정리해 버는 수입은 4천원 정도라 한다. 이런 곳에서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또 그 믿음을 대대로 전수하고자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은 헌금을 드리며, 신앙생활을 한다. 그리고 애굽이 하나님의 백성(나라)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들의 신앙 현장을 보며 우리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관념적이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붙들고 있는 사 19장의 말씀대로 이집트의 회복을 위해 이들을 사용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이집트의 상징이자 로망인 기자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러 갔다.
순례 4일차, 우리는 카이로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고센 지역의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방문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요로운 고센 지역을 보며,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서 당시 고대 근동의 강자 애굽의 그늘아래 야곱의 가족을 민족으로 키우셨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바로를 통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던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지만, 고센 지역보다 얼마나 더 풍요로울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굳이 자리 잘 잡고 있던 곳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그렇기에 하나님은 바로를 통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므로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출애굽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셨을 것이다. 무엇보다 육신의 풍족함 속에서 그들에게 슬며시 무겁게 젖어드는 것이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애굽의 본질인데, 그들은 스스로도 자신들에게 이러한 습성이 배어있는 줄 몰랐다가 출애굽 했을 때, 비로소 광야에서 애굽의 본성들이 튀어나오게 된다. 애굽에서 떠나고자 동기가 되었던 국고성들을 바라보며, 우리 인생에서도 세상을 벗하던 것에서 떠나는 동기들이 일어나고, 출애굽의 여정이 시작되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였다.
마라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시나이 반도의 수르 광야에 들어와 사흘 길을 통과하고 이른 곳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얻은 물은 써서 마시지 못했다. 출애굽 여정 초입에서 드디어 그들의 불평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며 물에 던지게 하여 그 물이 달게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이 계명을 잘 지키는지 시험하셨다. 사실 이 쓴물은 이스라엘의 현 상태를 보여준다. 애굽의 사고와 생활습관이 섞여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제시함으로 그들에게서 전인적인 치유를 일으키실 것을 선언한 것이다.
엘림을 지나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넘어가 저녁이 되었다. 르비딤은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한 곳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이곳 일대에 물이 풍부해, 그 물을 끌어다 시내산 호텔에서 쓴다고 한다. 그런데 출 17:1에서는 왜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고 했을까?
물이 그들 지척에 있어도 보이지 않게 하신게 아닐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백성들의 중심을 달아보시고 시험하셨던 것이 아닐까? 마라에서 내 계명을 준행하는지 시험하신다고 했고(15장),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내 율법을 준행하는지 시험하신다(16장)하셨는데, 17장에서도 이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시험하신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출 17:7에 그 답이 나와 있다. 7절에서 모세는 이 시험에 대한 평가를 “므리바(다툼)”로 표현하는데, 이는 백성들이 여호와가 우리중에 계신지 안계신지 시험함, 곧 불신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현장에서 말씀을 대할 때면 이전과는 또 다른 관점과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우리 삶 속에서도 가끔 주님이 시험하실 때면 갑자기 잘 보이고, 느끼던 것들도 먹통이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주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분과 말씀 속에 거하고자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시험을 통과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어느덧 늦은 저녁 우리는 시내 산 아래 숙소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새벽에 등정을 나가기 위해 잠시 눈을 붙인 뒤, 새벽 1시에 시내 산 등정을 위해 길을 나섰다. 시내산 입구에서 베드윈 가이드를 만나 함께 캐더린 수도원을 지나 낙타 타는 곳에 이르렀다. 여기서 올라가는데 3시간, 내려오는데 2시간이 소요된다. 낙타를 타고 올라도 산봉우리 밑 베이스캠프에서 750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일행 중 제일 나이가 많은 목사님(59년생)이 두 번째 시내 산에 오르는데, 모세가 두 번째 언약판을 메고 홀로 올라왔던 심정으로 오르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냥 올라오는 것도 이리 힘든데 40일, 40일을 연이어 금식하고 돌판을 들고 올라오던 모세의 심정은 어땠을까? 정말 간절한 아비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런 마음에서 정상에서 성도들에게 소감을 전하고, 축도하는 영상을 찍을 때, 가장 좋은 것을 받아 나누고 싶어하는 아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잔잔하나 무거운 감동이 몰려왔다.
다른 목사님들도 함께 느꼈는지 자기들도 교회에 한마디씩 인사하는 영상을 찍겠다고 나선다. 정상에는 조그만 교회와 모스크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모세가 기거했다는 작은 동굴이 있었다.
산을 내려오니 어느덧 아침을 먹을 시간이다. 식사 후 샤워한 뒤 곧장 국경을 넘기 위해 서둘러 버스에 탑승했다. 타바 항구에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페리로 1시간 반을 가면 요르단 아카바 항구에 도착한다. 우리의 이집트 여정은 그렇게 마무리되어지고 있었다.
글·송창엽 목사
서울신대(M.div), 백석 기독신대원 구약전공(Th.M)
시티미션처치(예성) 협동목사, 헤븐리라이트미니스트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