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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성지순례 (1)
사도행전 성지순례, 그리스와 터키를 중심으로
2026-03-03 오후 2:48:00    성결신문 기자   



우리가 보통 사도행전 성지순례를 생각하면 그리스와 터키에 로마까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는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지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되며, 터키는 수리아 안디옥과바울의 고향 다소, 1차 전도여행지와 3차 전도여행지, 그리고 7대교회가 성지순례의 대상이다. 로마를 추가하게 된다면, 3차 전도여행 후 바울이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하여 몰타(멜리데)를 거쳐 이태리의 남쪽 항구에 도착하여 로마로 입성한 뒤, 3년을 머물렀던 집터와 순교한 참수터,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신앙터인 카타콤을 순례하게 된다.

필자는 가장 일반적인 순례코스인 그리스와 터키를 중심으로 성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통상 그리스와 터키를 일정으로 한 일정은 현지에서 7박 8일 혹은 8박 9일로 진행한다. 

7박 8일의 경우 그리스 2박3일, 터키 5박 6일이며, 8박 9일의 경우엔 그리스가 3박 4일로 하루 추가된다. 그리스와 터키는 지중해식 기후라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다. 해서 늦가을부터는 비가 내리고, 해도 짧아져 각 기념지마다 입장시간이 짧아지게 된다. 대신 이때는 비수기라 입장료나 항공료, 숙박비가 많이 싸지기 때문에, 비수기에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를 계획하게 되면, 일정을 하루 이상 더 잡더라도 전체 비용으로는 성수기와 별차가 없게 되므로, 조금 더 여유롭게 일정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보통 여행사에서 잡은 일정들을 보면 비행기를 아테네 IN, 이스탄불 OUT으로 하여 성경에서 나오는 순서를 완전히 거꾸로 해서 가게 된다. 

아무래도 거꾸로 다니면 현장을 다님에도 실감이 반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일정을 잡는 이유는 이스탄불 IN, 아테네 OUT 비행기가 거꾸로 가는 것보다 통상 100불 정도가 더 비싸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터키로 넘어갈 때는 국경세를 안내는 반면,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어갈 때는 국경세를 내야 한다. 해서 일정을 뒤집는 것만으로 거의 개인당 18~20만원정도 여행경비가 올라가는 현실적인 이유로 일정을 역순으로 잡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는 사도 바울 당시 마게도냐 지방과 아가야 지방으로 이뤄져 있었다. 
마게도냐 지방에는 네압볼리(사도 바울 유럽도착 기념교회), 아볼로니아&암비볼리, 빌립보(루디아 기념교회),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이 사도 바울의 사역지로 소개되며, 아가야 지방에서는 아덴(아테네), 고린도가 사도 바울의 사역지였다.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가는 길은 버스로도 5시간 이상 걸리는데, 중간에 공중 수도원으로 유명한 메테오라와 영화 300으로 유명해진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스파르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았던 테르모필레 지역이 있어 일정에 따라 잠시 들르기도 한다.

마게도냐 지방과 아가야 지방은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의 기질과 지방색이 두드러지게 비교된다. 특히 마게도냐 사람은 그들의 위대한 조상 알렉산더의 후예인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자신들이 그리스 사람이 아니라 마게도냐 사람임을 애써 강조하는 경향이 오늘날까지도 있다. 그러한 지방색의 특징인지는 몰라도 사도 바울의 사역 역시 두 지방의 사역은 단기사역과 장기사역으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마게도냐 지방에서 처음 유럽본토에 발을 디딘 네압볼리부터 아볼로니아&암비볼리,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는 모두 2~4주의 짧은 기간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다. 대신 아가야 지방의 아덴(3개월 이상)과 고린도(1년 6개월)에서는 비교적 장기로 사역을 하며 교회를 세운다.  

4월의 그리스는 여행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다. 전 세계 교회들이 다 그렇듯이 부활절이라는 교회의 가장 큰 행사를 마치고 난 뒤엔 이스라엘, 그리스 할 것없이 순례객들로 가득차게 된다. 우리는 아테네 공항에서 내려 투어버스를 타고 유네스코 1호인 파르테논 신전으로 향했다.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언덕에는 아테네 시의원들이 함께 모이고 중대 범죄에 대한 사형을 결정하는 대법정인 아레오바고도 함께 있기에,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과 일반투어를 하는 사람들 모두 반드시 방문하는 아테네 제1의 필수코스이다. 주차장에 버스를 대고 현지 가이드를 만나 입장을 한다. 그룹방문팀은 미리 예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입장해야 한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시의 주신인 아테나 여신을 모신 곳이다. 이 신전은 역사 속에서 도시의 주인들에 의해 용도와 주인이 바뀌게 된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아테나 여신을 모신 신전으로, 기독교가 국교인 동로마 제국 때는 성모 마리아의 교회가 되어 기독교 순례지가 되고 오스만투르크 제국 때에는 모스크로 사용되었다가 베네치아의 침공 때에는 화약창고로 쓰이기도 했다. 보통 투어는 낮에 진행되고, 코발트 빛 하늘과 파르테논 신전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지만, 밤에 조명에 비친 대리석은 선명한 황금색으로 바뀌며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기에, 아테네에서 숙박을 한다면, 필히 저녁에 구경하기를 추천한다. 

순례객들에게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출구에 위치한 아레오바고 언덕이 훨씬 중요하다. 아레오바고는 ‘아레스의 반석’이라는 의미인데, 사형에 해당되는 중요범죄에 대한 최종 판결을 하는 대법정이 있던 곳이다.  사형 판결을 하는 대법정 ‘아레스의 반석’에서 사도 바울은 반석이신 하나님, 곧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결정하는 최후심판의 주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던 대법정에 재판 당사자가 아님에도 시의 지도자들과 귀부인들이 모인 자리에 초청을 받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 특히 이런 영적 배경의 극적 대조를 이루는 현장에서 복음을 전할수 있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뜻하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행 17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 아래 고대 아고라에서 복음을 전한 뒤 이곳 아레오바고로 올라온다. 

행 17:16~21의 내용은 짧지만 비교적 많은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냐 지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어느 정도 자리잡을 수 있게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 누가 등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들을 아덴에서 기다리면서 회당과 장터(아고라)에서 날마다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며,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과도 변론을 했다. 

그런데 이들이 바울을 ‘말쟁이’라고 표현하는 것(행 17:18)으로 보아 대랍비 가마리엘 문하에서 랍비중의 랍비로 공부하며 성장했던 바울의 지식은 그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아레오바고에서 설교를 할 때, 그는 그 당시 유행하던 유명한 시인들의 글들을 여럿 인용했기에 그는 성경 외에 다른 헬라문학에도 박식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대법정에서 재판이 아니라 설교를 했다는 것은 그가 체류하고 있던 기간 중 많은 아덴 사람들에게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그의 지식을 들어보고자 당시 아레오바고 관리들(시의원 혹은 대법관들)이 아레오바고라는 공식장소에 초청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로 치면 국회의원이나 법관들에게 초청받아 국회나 대법정에서 그가 연설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단서들을 종합해 볼때 그의 아덴에서의 체류기간은 단기간이 아니었고, 시의원들의 초청을 받을만큼 그의 학문과 변론이 도시에 알려지고, 주목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초청받은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설교 이후 몇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누시오와 귀부인 디마리가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이들은 아덴에 세워진 교회에 주요한 리더로 섬겼다고 한다. 

이런 내용들을 고려해 보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아덴 사역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회당에서나 장터에서, 그리고 철학자와의 만남에서, 아레오바고 관리들 앞에서 그는 환경과 대상에 따라 적절하게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아덴에도 복음의 열매가 교회로 세워졌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동역자들의 귀환이 늦어지고,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아덴에서 충분히 복음이 전해졌다고 판단한 바울은 이제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향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고린도로 가려면 주요 도로상에서 아덴을 거쳐야 한다. 동역자들이 먼저 아덴에 도착했을 때 바울이 없다면 그들은 바울을 수소문하기 위해 그가 사역했을 회당과 교회를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바울이 고린도로 옮겨간 것을 알게 되면 이내 고린도로 그를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찾아간 고린도는 그 당시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무역이 발달한 도시였다. 고린도는 아드리아해를 접하는 렉카이온 항구와 에게해를 접하는 겐그레아 항구 사이에 위치한 도시로, 사실상 두 항구를 가지고 있는 대도시였다. 

두 항구사이의 거리는 불과 10~11km인데, 그곳에 고린도 도시가 있었다. 두 항구를 배로 돌아가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걸리기에, 두 항구 사이에 운하를 뚫고자 하는 시도가 고대 시대부터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실제 운하가 만들어진 것은 1893년 8월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 당시에는 한쪽 항구에서 짐을 모두 부린 다음 육로(배를 옮기는 길을 ‘디올코스’라 부름)로 배를 이동시켜 건너편 항구로 옮긴 뒤 다음 여정을 위한 물건들을 싣는 방식을 택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이뤄지는 동안 선원들은 고린도 도시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신전에 가서 다음 항해를 위한 제사를 올렸다. 당시 고린도 도시가 섬겼던 주신은 비너스인데, 미의 여신이면서, 매춘의 여신이다. 주신이 여신이므로 그를 섬기는 여사제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제사과정에서 성관계를 가지는 공창(公娼)이었다. 

미의 여신을 섬기는 여사제들이기에 미모도 상당했으리라. 생명을 걸고 거친 바다와 싸우는 뱃사람들의 살고자 하는 욕구와 그 스트레스를 성적인 것으로 푸는데 있어 이 신전과 제사행위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도시적 영향으로 그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고린도는 대단히 음란한 도시로 유명했기에, 그 당시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을 가리켜 “고린도 사람처럼 산다(κορινθιαζομαι 코린티아조마이)”라는 표현이 있기까지 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도시의 영적배경 속에 세워졌기에 강력한 은사들도 많이 나타났지만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들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 할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교회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최소 4번의 편지를 보내고, 직접 심방까지 해야만 했다. 전승에 따르면 고린도 교회의 1대 주교는 바울, 2대는 아볼로, 3대는 실라였다고 한다. 

사도행전 18장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라는 좋은 동역자를 만나게 된다. 당시 고린도는 로마의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유대인들의 로마 추방령(주후 49년)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밀려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택부족으로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임시숙소인 천막수요가 급증하게 되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이 천막을 보수하는 일감이 계속 줄을 잇던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천막업을 하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난 바울은 그의 집에서 같이 천막일을 도우며 고린도에서 사역을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대단히 전략적인 선택이었는데, 그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모이는 회당에서는 대부분 히브리어 성경이 아닌 헬라어 성경(Septuagin)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본토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히브리어로 말씀을 주셨는데, 이것을 헬라어로 옮기면 본질과 신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했기에, 헬라어 성경을 쓰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아울러 헬라 지역에서는 랍비를 양성하는 신학교인 ‘예시바’가 없었기에, 랍비가 되려면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공부를 마친 자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보다 본토에 눌러앉는 경우가 많았기에, 디아스포라 회당의 경우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칠만한 사람들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랍비들 안에서도 크게 두 부류의 그룹이 있었는데, 그것은 ‘스미카’의 유무였다. ‘스미카’는 율법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지식이 쌓여진 것을 인증하는 권위이다. ‘스미카’가 없는 랍비들은 기존에 말씀을 연구한 랍비들의 의견을 인용만 할 수 있었다(예: “이 말씀에 대해 랍비 누구는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그에 비해, ‘스미카’가 있는 랍비들은 말씀 해석에 있어 기존 랍비들의 의견에 더해 자신의 견해도 말할 수 있었다(예: “이 말씀에 대해 랍비 누구는 이렇게 해석을 했는데, 저는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스미카’를 가진 자는 말씀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기에, 산헤드린 공회나 지역 유대사회에서 여러 다툼에 대해 종교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재판위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디아스포라 회당에서는 랍비들이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회당장이 회당을 관리하면서 주로 예배를 인도했다. 

안식일에 모여 예배할 때 회당장이 일어나서 토라포션에 따라 그날 읽어야 하는 모세오경 한 구절, 선지서 한 구절, 시편 한 구절을 읽고 나면, 회당장이 “우리 중에 혹 이 말씀을 강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서 우리를 권면해 주시오” 하고 초청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당시 대학자 가마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던 랍비중의 랍비였다. 

그리고 그가 산헤드린 공회에 참석해 찬성투표를 한 것(행 26:10)으로 보아 그는 ‘스미카’를 받은 전문 랍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안식일 날 바리새인 복장을 하고 회당 내 바리새인 구역에 앉아 있었다면, 회당장은 필시 그에게 말씀을 강론해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행 13:14~15). 

그리고 그 당시 회당에는 유대교에 입문하고자 했던 헬라 귀족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이 유대교에 입교함에 있어 제일 걸림돌은 여러 율법들 중 ‘코셔(음식정결법)’와 ‘할례’였다. 왜냐면 헬라사람들에게 주식은 돼지고기였고, 할례는 유럽과 근동지역을 통틀어 유대인과 이스마엘의 후손만이 하던 것으로, 당시에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던 사회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헬라권 문화에서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여겨, 지식활동만큼이나 체육활동을 중요시 여겼다. 해서 그 당시 올림픽과 같은 체육경기에서 남자들은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힘(근육)과 기술을 과시했는데, 이때 할례를 행한게 노출되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목욕문화가 발달한 로마에서 귀족들의 교제가 주로 목욕탕에서 이뤄질 때 할례가 노출된다는 것도 공개적으로 조롱거리가 될 수 있어 유력자일수록 할례를 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유대교의 율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 이 코셔와 할례를 하지 못한 채 회당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God fearer)’라고 불렀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급진적인 복음을 전했는데, 여기에 대해 회당에서 제일 반응이 뜨거웠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곧 유대교에 관심있던 경건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어려워하던 율법을 지키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귀가 번쩍 뜨였을 것이다. 

특히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유력자들이기에 이들이 교회의 구성원이 될 때, 교회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힘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사도 바울은 회당전도에서 로마시민권만큼이나 자신의 전문랍비의 권위(스미카)를 복음전도에 적극 활용하였고, 전도대상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역의 유력자들을 전략적으로 공략했던 것이다. 물론 사도 바울은 회당전도가 끝나면 거리로 나가 장터(아고라)에서 일반인들에 복음을 전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렇게 고린도에서의 회당전도를 통해 사도 바울은 회당장 그리스보를 비롯한 여러 형제들을 얻을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들과 함께 회당 옆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교회로 모일 수 있었고, 여기서 1년 6개월동안 교회를 양육하였다(행 5:5~11). 

유대인 추방령이 있은지 햇수로 두 해가 지난 주후 51년에 갈리오가 고린도 총독으로 부임하자 기존 회당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에서 참소한다. 그러나 갈리오 총독은 로마의 실정법 문제가 아닌 유대인들 사이의 종교법에 대한 다툼인 것을 간파하고, 너희들의 종교적 문제는 법정 밖에서 다투도록 처리한다. 

이러한 소동 이후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도시를 떠나야 할 때임을 깨닫고 동역자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로 향하게 된다. 

오늘날 고린도에는 당시 갈리오 총독이 재판하던 베마가 남아있다. 베마 앞에 서서 그 당시 바울도 이렇게 섰을텐데,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잠시 묵상해 본다. 순간 주변에서 베마 위에 앉은 갈리오 총독을 향해 외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순례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떠드는 많은 순례객들과 오버랩된다. 

현장은 이렇게 우리에게 사실을 현실같이 생생하게 재현될 수 있게 돕는다. 텔 고린도에는 그 당시 고린도에 회당이 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 작은 박물관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또 텔 고린도 외곽 극장터 광장에는 그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 중 도시 재무관이었던 에라스도(롬 16:23)의 이름이 새겨진 머릿돌이 발견되어 성경의 사실성을 더해 준다. 이렇게 숨가쁜 첫째 날의 여정이 마무리된다.  

글·송창엽 목사
시티미션처치(예성) 협동목사, 헤븐리라이트미니스트리 대표
debtor610@hanmail.net
기자 : 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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