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정보는 홍수처럼 쏟아지고 욕망은 쉴 새 없이 자극받으며 다양한 선택지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늘어났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과잉된 이 시대에 우리는 더 깊은 결핍과 공허를 함께 경험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많이’를 외치기보다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힘, 그것이 곧 자기 절제다. 이 오래된 덕목을 오늘의 시대에 다시 묻는다.
언론은 매일 그 민낯을 보여준다. 박사가 되고, 명성을 얻은 이들도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와 도덕성은 한순간 무너지지 않는가. 성공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적 능력 못지않게 자기 절제력이 함께 요구된다. 레프 톨스토이는 “자제력 없는 좋은 인생이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더구나 우리는 최후승리를 얻고자 하는 십자가 군병이 아닌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절제(self control)란 무엇인가. 감정과 욕망이 지나치지 않도록 조절하는 자제력이다. 인간의 욕망은 본래 끝이 없다. 그러므로 단순히 욕망을 참는 소극적 행위를 넘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통제하려는 강인한 영성이 요구된다. 절제라는 성벽이 없는 인생은 사소한 유혹과 감정의 물결 앞에서도 쉽게 무너진다.
마음을 지키는 견고한 성벽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혼란한 이 시대에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의 힘만으로 부족하니, 성령의 열매인 절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무엇을 절제할 것인가. 먼저 보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 눈은 욕망을 자극하고 마음을 흩뜨리는 첫 번째 관문이다. 알고리즘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스마트폰과 온디맨드(on-demand) 콘텐츠 환경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쉬지 않고 자극을 받는다. 눈이 풀어지면 마음이 풀어지고, 마음이 풀어지면 삶의 질서도 함께 무너진다.
또한 감정의 절제는 더욱 치열한 싸움을 요구한다. 느끼는 즉시 표출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대다. 즉흥적인 반응에 길든 탓에, 내면의 감정은 곧바로 분출되며 자극적인 언어가 튀어나온다. 운전대를 잡았을 때 드러나는 거친 행동, 감정이 격해질 때 튀어나오는 정제되지 않은 날 선 언어가 그 증거다. 성경은 말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어찌 이것뿐이랴. 삶의 다양한 분야에서 멈춤이 필요하다. 끊임없는 소비를 충동질하는 광고들이 넘쳐나는 시대, 과잉 소유와 무분별한 소비를 자제하려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일까?’ 이 질문을 습관처럼 던지는 지혜가 절실하다.
덜 소유함으로써 더 자유로워지는 역설을 진정 깨달을 수 있다면….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은 이미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고 있다.
결국, 절제된 삶은 ‘덜어냄’을 통해 진정한 천국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이다. 쏟아지는 자극 앞에서 잠시 멈추는 용기, 풍요 속에서 꼭 필요한 것만 선택하는 안목, 흔들리는 세상에서 내면의 견고함을 지키는 힘―바로 이것이 영적인 삶의 기초가 된다. 신앙의 역사가 증언하듯, 절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다스리는 거룩한 태도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금식과 기도 그리고 검소한 일상처럼, 절제된 삶은 영혼을 아름답게 다듬어 가는 연단의 과정이다.
사순절, 이 거룩한 여정에 성경은 권면한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김만성 군선교목사(산위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