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만 목사(오산교회·본지 편집위원)
얼마 전 내가 속해 있는 경찰서 경목회에 참석하여 경찰서장을 비롯한 각 과장들과 경목회 목회자들이 연합하여 경찰서 신우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참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 먼저 경목 위원장의 인사와 더불어 서장의 인사가 이어졌는데, 서장의 인사말 가운데 내 자신으로 하여금 뭔가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한마디가 있었다. 그 한마디는“오늘날 시민들은 우리 경찰관들에게 고도의 친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인즉 밤마다 파출소에서는 술 취한 사람들로 인하여 전쟁 아닌 전쟁을 해야 한다고 했다. 늦은 밤 갖가지 영업집에서 술 취한 사람들의 행패로 인하여 파출소로 신고가 들어오게 되면 일단 파출소로 데려가서, 그 술이 깨기까지 돌보아야 하는 형편인데, 취객이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관들은 모두를 받아 주어야 하는 형편이기에 참으로 힘들다는 고백이다. 혹 그들의 행패에 엄격히 대처라도 할라치면 금방 문제가 되어 매스컴을 타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씩 비행기를 탈 때면,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비행기 승무원 곧 스튜어디스들의 베푸는 친절을 대하게 된다.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승객들을 대하는 그 친절함을 대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도 친절할 수가 있을까라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는 직업의식 내지는 자신의 직장유지, 더 나아가서는 진정한 서비스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유야 어쨌든 저들이라고 왜 자존심이 없을 것이며, 속이 없겠는가? 저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때때로 느끼는 불쾌함 혹은 속상함이 왜 없겠는가 말이다. 이들을 보며 생각건대는 오늘날 교회 안의 나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저들만한 친절과 배려만 있다면 그곳은 진정한 이 땅의 천국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스치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인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차원의 친절, 혹은 삶의 덕은 그 수치가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터넷상의 세인들이 기독교를 향한 질타는 그 수치가 한계를 넘어서 있는 상태인데, 물론 말 그대로 안티크리스천들의 무조건적인 비방과 언어 폭력은 대꾸할 가치도 없지만, 그러나 저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친절과 배려, 나아가 그 사랑의 정도는 어느 정도나 될까를 늘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언제나 그 기준이 하나님과 이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화가가 “나는 정말 유명한 화가”라고 자랑한다고 유명해 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림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피아노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피아니스트이겠는가? 가끔 가다가 피아노 건반 위에 앉아서 뚱땅거린다고 모두가 피아니스트겠는가 말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예수 믿은 지가 얼마이며, 직분이 무엇이며, 자랑한다고 사람들이 아니 하나님이 믿어 주시겠는가?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말만 잘하는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과 세상은 필요로 하고 있지 않다. 믿음과 함께 우리에게 요구 되는 것은 신앙의 덕, 곧 행함이어야 할 것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