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기 목사 (성결대학교 교목)
한국인의 심성을 말할 때 흔히 정서적 카타르시스(Catharsis)가 심한 편이라고 이야기 한다. 한국인의 성격에서 윤태림 교수는 “한국인의 조상에 대한 극진한 제사와 숭배도 그 행동의 깊은 곳에는, 억압하고 구속하던 생존 시의 어른들에 대해 품었던 증오심과 빨리 죽어 없어졌으면 하는 부덕한 생각을 뉘우치며 속죄하려는 양립된 감정(ambivalent)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조지훈은 한국문화사서설에서 우리들이 언제나 주의해야 할 것은, “한 나라의 민족성을 연구할 때 현재의 상태에만 머물러서 비판하거나 낙관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돌이켜 보건대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요동반도를 호령하고 만주 벌판을 달릴 적에는 결코 울고만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며, 신라의 첨성대에 가서 어느 누가 그 속에서 눈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예술적 가치 기준도 “저 그림의 소나무는 펄펄 살아 있는 것 같다”는 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살아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한민족은 풍류를 즐기면서 멋들어지게 사는 것이 생활 이상이기도 하였다.
그러했건만 이런 한민족성은 자연의 위력 앞에 시달리면서, 민족적, 가족적 환란이 거듭되어 오는 가운데, 어느 듯 ‘수심가’와 ‘아리랑’을 애창하게 되었고, ‘심청전’과 ‘콩쥐팥쥐‘를 애독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인 특유의 마조키즘(Masochism)과 카타르시스를 역이용하여, 광신주의자들은 마치 알코올 중독자나 아편 중독자들처럼, 인간의 자유의지와 독립심을 약화시켜 울면서 방황하는 나약한 양의 무리로 만들고 있다.
한국인의 종교병리적 소인(素因)들을 살펴보면 한국인의 정신구조(mental structure) 내부 즉, 한국인의 무의식의 영역을 들여다보면, 무교(巫敎),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등의 요소들이 혼합, 갈등, 대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현대의 한국인들의 정신 구조는 임상정신의학에 볼 때 인격 분열과 정신병이 일어나기 가장 좋은 온상이 되며, 따라서 ‘마음의 평형’과 행동양식의 통일‘을 유지하기가 무척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러한 내부 분열과 혼란을 모면하기 위해서 오랜 전부터 애용되어 온 처방이 ‘자아상실증’(Non Ego Syndrome)에 빠지는 일이요, 두 번째 처방이 ‘종교에의 집념’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처방은 필연적으로 유사종교를 성행하게 만든다. 사이비 신흥종교가 번창해 가는 것은 종교적 망상병(妄想炳)이 한 집단 안에 공유하는 현상인데, 이러한 종교망상병이 광적으로 나타나는 데는 다분히 한국인의 정신 속에 흘러 온 샤머니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인의 종교병리의 소인 가운데 또 하나 뺄 수 없는 것은, 한국인의 마술관념이다. 그런데 이 마술관념 유용론에 대해서는 심리학적으로 많이 논란되어 왔지만 어떤 이는 이 마술관념이 위기의식에 대해 심리적으로 진정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째든 한국적인 판타지는 거의가 다 마술적이고 도피적인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망아(妄我) 황홀(恍惚) 허탈(虛脫)에서 만사를 빌면 된다든지, 어떤 기상천외의 요행을 바라는 것들이다. 특히 ‘흥부와 놀부’의 교훈적이면서도 마술적 타부가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물론 우리 한민족성에 대해 쉽사리 실망하거나 비판하지는 않는다. 조지훈은 지조론(志操論)에서 “한국 민족성의 기본구조를 평화성, 격정성, 적응성, 보수성, 수용성, 난숙성의 6가지를 들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 민족성 안에는 언제나 그 강력한 양극성을 지양하고, 조화되어야만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 외곬으로만 기울면 꼭 열성으로 쇠퇴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민족성은 늘 모순된 양면성을 초극하고 조화를 이루어 가는 강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종교계는 그 사정이 좀 달라서 매우 극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기존종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종교 자체의 존재 이유를 진지하게 질문하는 ‘아픔’을 겪어야 할 것이며, 교회는 우선 피곤하고 불안한 심령을 감싸주어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심령의 안식처’(psychological home)가 되어 줄 뿐 아니라, 누구나 언제든지 와서 심령의 병을 사랑의 능력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열려진 관계’(Open Relationship)를 가져야 하겠다.
그러면서 교회는 지금까지 누적되어 온 비복음적인 요소와 침략적이고 독선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제거하여 ‘새로움’을 옷 입어야 될 것이다. 죄의 뿌리는 최상의 분석으로도 이를 해체하거나 약화시키기는 어렵다. 이는 오로지 올바른 ‘목회적 대화’를 통해서 울려오는 ‘사죄(赦罪)의 선언(宣言)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의 참 의미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저력과 통찰력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가치가 아니라 ‘의미’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이 보여 주는 생의 의미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도록 교회는 인도해야만 한다. 교회의 치료목적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경험적으로 적용케 하는 데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