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 목사 (삼성교회)
자끄 엘룰은 그의 책 「존재의 이유」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 모략과 중상의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계 속에서 삶의 의미조차 왜곡시키며 혼돈하며 살고 있는 인간들의 종국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세속적 출세와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아부하며, 줄타기를 하며, 더러운 이(利)를 탐하는 역사의 세계에서 ‘나’라는 실존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질문한다. 이렇게 어두운 면들이 인간 사회의 필연이라면 이러한 필연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엘룰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대답이 「존재의 이유」라는 책을 통한 전도서 해석이다. 그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코헬레트(히브리어로 ‘전도자’를 뜻함)의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것이 헛되다는 코헬레트의 선언은 그들의 인생여정에 귀한 이정표가 되었다. 헤벨(히브리어로 ‘헛됨’을 뜻함)은 해아래서 행해지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모든 시대를 통해 인간들이 그렇게도 집요하게 추구하는 명예와 권력, 출세에 대한 야망, 돈과 같은 세속적 요소들은 물론이요,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는 노동과 행복, 심지어 선(善)까지도 코헬레트에게는 모두 헛된 것일 뿐이다. 물론 코헬레트는 노동과 행복을 권력과 야망에 비해 그나마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코헬레트는 전도서를 그리스 사상에 대한 히브리 사상의 응전으로 바라보며 인간의 지혜가 삶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코헬레트의 사상은 폴 틸리히의 ‘소외’(estrangement)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폴 틸리히는 서양철학의 실존과 본질의 개념을 빌려와 인간의 실존이 본질로 부터 멀어진 사건이 소외이며 이것이 바로 죄라고 주장하였다. 본질로 부터 멀어진 실존이 그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한 일의 반복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본질로 부터 멀어진 실존의 소외는 불신앙과 교만과 육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누군가가 불신앙과 교만과 육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은 실존이 본질로 부터 소외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코헬레트가 바라본 “헛된 인간의 삶”과 폴 틸리히의 “실존이 본질로 부터 소외된 인간”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에 대한 비관적 관점이다. 코헬레트는 이러한 비관적인 인간의 실존이라는 문제 앞에 하나님의 존재를 대두시킨다. 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창조하신 엘로힘이시다. 그는 창조자다. 그를 기억하라고 외친다. 코헬레트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분석을 마치면서 인간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외친다.
왜인가? 존 웨슬리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비관적이다(pessimism of nature). 그 본성은 초두에서 말했듯이 온갖 명예와 권력과 돈과 육욕에 대한 집착일 뿐이며, 이러한 모든 것은 코헬레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하듯이 헛된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인간들은 이러한 것을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그토록 손아귀에 잡지 못해 노심초사하는가? 바로 비관적이며 헛된 인간의 본성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은 의와 거룩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형상인데 의와 거룩과 사랑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실존은 불신앙과 교만과 육욕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낙관론(optimism of grace)을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은 비관적이지만 그 분의 은총이 우리를 불신앙과 교만과 육욕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우리의 본질적 모습인 의와 거룩과 사랑을 회복하게 하실 것이다. 실존이 본질에서 소외되어 있는 절망적인 상황도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볼 때 낙관적이 된다.
나를 포함한 주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헛된 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바라 볼 때마다, 그들의 실존(불신앙, 교만, 육욕)이 본질(의, 거룩, 사랑)로 부터 소외된 모습을 볼 때마다, 많이 절망하며 상처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실존을 치유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