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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도 길이 된다
2014-08-21 오후 4:05:00    성결신문 기자   


이철환 작가

제가 초등학교 다닐 적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형편이 더 어려워진 탓에 조그만 집들이 모여 있는 산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아버지는 하루하루 다른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예전처럼 어린 자식들을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고 웃음마저 잃어 가는 듯 했습니다.

밤늦은 시간부터 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산동네 집들을 송두리째 날려 보내려는 듯 사나운 비바람도 몰아쳤습니다. 비 오는 날이 계속되면서 곰팡이 핀 천장에는 동그랗게 물이 고였습니다. 빗물이 한 두 방울 씩 떨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빗물이 방울져 내렸습니다. 엄마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걸레 대신 양동이를 받쳐 놓았습니다.

“이걸 어쩌나, 이렇게 비가 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손 좀 볼 걸 그랬어요.”
엄마의 다급해진 목소리에도 돌아누운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며칠 전 오토바이와 부딪쳐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아버지는 한쪽 손에 깁스를 한 불편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마음 아픈 날이면 언제나 그랬듯 아버지는 엄마에게 돈을 받아들고 술을 사러 천둥치는 밤거리로 나갔습니다. 밤 12시가 다 되도록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창밖에선 여전히 천둥소리가 요란했고, 밤이 깊을수록 우리들의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엄마와 누나는 우산을 가지고 대문 밖을 나섰습니다.

“우리도 나가볼까?” 형과 함께 저도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습니다.
아버지를 찾아 동네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비바람 소리만 장례행렬처럼 웅성거릴 뿐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집 앞 골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우산을 받쳐 든 엄마와 누나가 지붕 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엄마, 저기 봐!”
순간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지붕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검은 그림자는 분명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천둥치는 지붕 위에서 사나운 비를 맞으며 빗물이 새는 깨어진 기와 위에 앉아 우산을 받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누나가 아버지를 부르려 하자 엄마는 누나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가엾어도 지금은 아버지를 부르지 말자. 너희들과 엄마를 위해서 아버지가 저것마저 하실 수 없다면 더 슬퍼하실 지도 모르잖아.”

엄마는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우리들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가난을 안겨주었다는 생각에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리고 아팠을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아픔을 겪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은 아픔도 우리의 삶을 밀고 가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픔도 길이 된다.'는 이야기로 강연의 끝을 맺을까 합니다.

오래 전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적 같은 반 친구였습니다. 저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업고등학교에 다녔고, 졸업 후 공장에 다녔습니다. 그녀는 명문여대에 다녔습니다.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학교 앞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학교 앞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공장에서 일한다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예쁜 그녀는 상냥히 웃어주었습니다. 작아지지 않으려고 저는 책 이야기만 했습니다. 칸트와 샤르트르와 마르크스와 랭보를 이야기 했던 것은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저를 감추고 싶었습니다. 다시 만나자고 하면 만나 줄 그녀였습니다. 정도 많고 이해심도 많은 그녀였습니다.

다시 만나자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저는 삶의 방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공장에 다녔고, 가난할지도 모를 소설가가 제 꿈의 전부였습니다. 마음 어둑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산도 버리고 비를 맞았습니다. 빨개진 손가락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날의 절망과 열등감은 두고두고 저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 후 세월은 물고기처럼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다녔던 여대 채플 시간에 강연 초대를 받았습니다. 담당자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 전의 그녀가 생각났습니다. 강연 당일,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여러분을 위한 자리일 수도 있지만, 아주 오랫동안 상처로 남아 있는 제 안의 열등감을 치유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빛과 어둠으로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다보면 아픔도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여러분 중에도 아픔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용기 내시기 바랍니다.

아픔은 단지,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픔은 길이 되기도 합니다. 아픔 없이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두워야만 빛나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픔을 통해 우리들은 겸손을 배울 수 있고, 진실을 배울 수 있고 감사를 배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픔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지요."

기자 : 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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