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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회의 큰 스승 김응조 목사를 추모하며
성결교회의 큰 스승 김응조 목사를 추모하며
2016-04-25 오전 11:37:00    성결신문 기자   


영암 김응조 목사는 한 세기 한국성결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적인 지주이셨다. 그는 성결교의 상징일 뿐 아니라 한국기독교사에서도 철저한 성서적 보수주의 신학자로서 한 획을 긋는 한국기독교계에 큰 어른이셨다. 
김응조 목사는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교회에 공헌하였다. 유능한 목회자였으며, 능력 있는 부흥사였고, 많은 책을 저술한 저술가였으며, 교육가로서 기독교 명문사학으로 도약하려는 오늘의 성결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는 철저한 민족운동가로서 행동하는 애국자였으며, 성서적 복음주의 신앙으로 세속화에 맞서 싸운 실천적인 지도자였다. 

총회에서는 영암의 신앙을 기리며 그의 신앙정신을 고양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하도록 지난 2010년부터 ‘영암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여 왔다. 성결인 모두가 영암의 신앙정신을 고양하고 계승하는 이 일에 함께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금번에 영암 김응조 목사의 25주기 추모일을 맞아 ‘내가 만난 김응조 목사님’ 이라는 주제로 목사님을 회고하는 네 분의 글들을 모았다. 그 분의 신앙과 우리에게 남겨주신 소중한 신앙유산을 다시 새기는 4월의 성결인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1. 김응조 목사의 생애와 사역

김응조 목사는 경북 영덕 낙평동에서 1896년 12월 3일, 부친 김원섭 씨와 모친 함영국 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가 14살이 되던 1910년, 부친인 김원섭의 입교로 5명의 가족과 함께 김응조의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원님이 꿈이었던 김응조는 어느 주일날 선생님으로부터 모세에 대한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아 원님이 아닌 모세의 꿈을 갖게 되었다.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유학에 뜻을 두었으나 좌절되자 그는 기도와 성경 연구로 준비하여 1917년 4월 15일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신학도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김 목사는 1919년 3월 기미독립운동에 학생대표로 참가해 독립의 함성을 외쳤다. 그는 선언문을 휴대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다 체포되어 4년 구형에 2년 실형을 언도 받고,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 목사는 34세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져 여섯 가지 질병에 시달렸지만 신유의 체험을 통해 낫게 된다. 이 사건은 김응조 목사의 생애에 있어 신유의 은사체험이자 심령의 변화체험으로 기록된다. 그 때부터 자신의 아호를 ‘영암’이라 하게 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생애에 큰 전환이 일어난다.

김응조 목사는 1937년을 전후하여 신사참배에 대한 압력에 끝까지 대항하였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공직을 사임, 독립전도의 길을 걸었다. 그는 자비량으로 전도계획을 세우고 문서전도지인 ‘생명지광(生命之光)’을 매달 3000부 발행하여 국내는 물론 만주와 일본에까지 독자를 확보해 나갔다. 또한 그는 초교파적인 전국 순회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순회부흥전도자로 활동했다.

김응조 목사는 1957년 7개월간 미국을 순방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한편, 미국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신학계의 동향을 살필 기회를 가졌다. 김 목사는 한국교회와 신학계도 머지않아 서구의 영향을 받아 세속화될 것으로 판단, 귀국하는 즉시 보수적 관점의 성경주석을 썼다. 그는 성결교단이 1961년 WCC 가입문제로 양분되자 뜻을 같이하는 교단 지도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사조를 배격,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결성했다. 그는 1962년 성결대학교의 전신인 성결교신학교를 개교하고, 1980년까지 교장을 맡아 30여년 간 후학을 가르쳤다. 
김응조 목사는 ‘성서대강해’를 전후하여 쉴 사이 없이 집필을 계속하여 생애가운데 41권의 저작을 남겼다.

2. 내가 만난 김응조 목사님

1)주님의 발자취를 따르신 스승을 추모하며 [이철용 목사 / 창신교회 원로]

1962년 9월 교단 분립 후 신학교 설립의 시급성을 느낀 김응조 목사님은 어떤 준비 철차의 겨를도 없이 서대문 충정로에 있는 당신의 자택을 개방하여 학생을 모집하였다. 안방과 거실은 식당으로, 목사님의 2남 김동희 박사는 당시 신혼부부였으나 미국에 유학을 보내고 그 방을 사무실로 그리고 2층은 강의실로 밤에는 기숙사로 사용케 하셨다. 주님의 십자가를 친히 지는 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가 없는 학원으로 고발을 당하여 조사를 받게 되면, 학생들을 며칠 씩 특별기도 기간 혹은 전도 실습 기간 등으로 하여 귀향케 하시기도 하였다. 옆집의 고발도 있었다(김 모 영화배우). 운영의 어려움, 가정생활의 어려움, 고발의 어려움 등을 굳건히 감내하시며 신학교를 세우신 목사님이시었다. 모여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교계에 유능한 목사님들을 초빙하여 좋은 강사진을 확보하셨다. 감리교의 변홍규 박사, 장로교의 차남진 박사, 박형용 박사, 박아론 박사, 김치선 박사 등등. 학생들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교계에 유명한 목사님들을 대거 초빙하여 수강케 하셨다. 

재학 중에는 결혼이 금해졌으며, 그 당시 서대문에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가 있었는데, 어느 학생은 그 교회 예배에 출석했다고 해서 퇴학 처분이 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그 교회는 방언을 위주로 하는 교회로 교계에서 이단시 되었었다. 연애는 물론 결혼, 신비운동에 엄격하셨다. 농촌교회를 섬기는 학생에게는 선교비를 지원해주셨다. 생활비도 지원해주셨다. 

제가 3학년 때에 양평 개군교회에 예배인도를 하였었다.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어 금요일 공부가 끝나면 토요일에 20만원(63년도)의 공사비를 지불하여야만 했었다. 경기지방의 교회들을 방문하여 모금하였으나 어려웠다. 토요일에 하는 수 없이 김응조 목사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기다려!” 하시고는 나가셨다가 들어오시더니 63년 당시 20만원(현 2천만원)을 선뜻 내 주셨다. 나는 날듯이 가볍게 내려가서 임금을 지불하고 주일을 지키게 됐었다.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강원도 청년으로 목사님들의 중매로 대전에 대동장로교회 여전도사와 선을 보고 다음날  목사님들의 강압적 권유에 의해서 약혼식이 이루어졌었다. 이 여전도사는 돌아가서 황당했었다고 한다. 듣도 보지도 못한 신학생과 약혼하다니 기가차서 고민 끝에, 담임목사님께 그의 스승인 김응조 목사님을 모셔다 부흥집회를 개최하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김 목사님의 부흥회를 통해 넘치는 은혜를 받고 그 스승의 제자면 됐다고 하는 마음의 결정을 하게 됐었다고 하니, 김 목사님께서는 나의 결혼에도 결정을 주시게 되었다. 

목사님은 신학자시고 대 설교가이고 애국자이시고 부흥사시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신 대 스승이었다. 가르침의 뒤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일하는 자는 저를 비롯해서 많아 보이나 김응조 목사님의 가르침에 제대로 따르지 못한 부끄러움에 다시 옷깃을 여미며 다짐하면서 목사님을 추모합니다. 

2)영암은 참 성결인 이셨다 [조병창 목사 / 안양교회 원로]

성경 신·구약 전체를 보아도 성결한 성도가 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목격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 (벧전1:16)한 말씀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1:15) 하신 말씀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마5:8) 하신 말씀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하신 말씀에서 거룩한 성도되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소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결가족들은 모두가 성결해야 할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故 영암 김응조 목사님 25주기 추모예배를 드리며 영암의 생애를 살펴보면 한 생애를 성결인으로 사시다 가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사상도 보수적 복음신학 정신으로 많은 저서를 남긴 성결인 이었으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고 자유주의신학, 세속주의사상, 종교다원주의 신학사상을 배격하고 철저한 성결성이 확고한 정통신학의 위치를 지키며 성결인답게 사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질, 이성, 명예문제에도 깨끗하게 사신 성결한 분이십니다. 세속화되어가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지향성을 영암이 살아가신 길에서 찾아 성결인답게 살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불결한 지도자가 속출하는 시점에서 우리 예성 식구들은 영암의 걸어가신 길을 숙연한 자세로 재검토하면서 성결성 회복의 시발점이 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성교단, 성결대학이 새로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결가족들 앞에 이 글을 써 봅니다. 참 성결인답게 살아가는 성결인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3)김응조 목사님 기념교회 건립을 소망하며 [이종숙 교수 / 성결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

41년 전인 1975년, 나는 김응조 목사님의 외손부가 되었다. 김응조 목사님의 큰 따님이 나의 시모님 김원숙 권사님이시고, 나는 김원숙 권사님의 장남과 결혼하였던 것이다. 

 1976년부터 신학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88년에 지금의 음악학부 교수가 되었다. 처음에는 종교음악과로 기지개를 켰는데, 교회음악과로 명칭이 바뀌고, 나중에는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당당하게 그 몫을 다하게 되기까지 28년의 세월이 지났다.  어느덧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으니,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다. 무엇보다도 김응조 목사님을 모시는 가족의 일원이 되고, 성결대학교에서 오랫동안 봉직했던 나날은 언제까지라도 기쁨으로 기억할 것이다. 

처음 내가 신학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목사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목사님은 목회자의 기본적 자질의 하나로 예배음악 인도에 필요한 음악성을 꼽으셨다. 장차 목회를 할 학생들에게 반드시 교회음악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신 분도 목사님이셨다. 나는 목사님의 당부를 받들어서 찬송가의 역사, 찬송가 바로 부르기, 기초 피아노 교육, 지휘 등 통합 과목으로서의 음악을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큰 보람을 느꼈고, 이를 바라보시는 목사님 또한 매우 만족하셨다.  

 김응조 목사님은 2남 3녀의 자제분을 두셨다. 목사님의 장남과 장녀, 차녀는 수년 전 90수를 다하고 돌아가셨다. 여든여덟 살이 되신 막내 따님은 현재 미국의 플로리다에 거주하신다. 그분은 국가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하셨다. 막내 아드님인 김종회 교수는 오랫동안 카이스트에 재직하셨다. 그분 역시 국가 장학금을 받아 미국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카이스트에서 석좌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뉴저지에 거주하고 계신다. 특히 김종희 박사님의 딸, 김은수(Lisa Kim, violinist)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재원으로서, 맨해튼 음악대학의 교수이다. 또한 세계적인 뉴욕 필하모닉의 수석(an acting principal)주자로서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그 이가 김응조 목사님의 친손녀라는 사실은 매우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25년 전이다. 1991년 4월, 봄꽃이 만개하는 계절에 김응조 목사님은 영생의 길로 떠나셨다. 세월이 흐르고 2016년 다시 봄이다. 김응조 목사님과 함께 하던 그 봄꽃들은 여전히 교정 어디에서고 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동안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던 성결대학교는 구조조정의 암초를 만나 고군분투하고 있다. 위기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최선을 다할수록 좋을 것이지만, 눈앞의 위기를 성급하게 해결하기 위한 정도를 벗어난 구조조정으로 인해 성결대학교의 설립 이념에 흠집이 날까 우려하는 마음이 크다. 위기에 몰릴수록 신중한 판단과 100년 대계를 품는 거시적 안목이 절실하다. 

 4월 16일 아침에 극동방송은 김응조 목사님께서 1991년 4월 17일 영생의 길로 떠나신 날을 짚어주었다. 문득 설립자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운 성결대학교의 교정을 생각하고 쓸쓸해졌다. 성결대학교 개교 55주년을 맞이하는 내년에는 설립자이신 김응조 목사님을 기념하는 기념교회(YoungAm Memorial Chapel)가 건립되기를 소망해본다. 이제는 성결공동체의 뿌리 찾기 노력이 결실을 맺고, 교단의 지도자 배출을 위한 비전, 철학을 확립할 때이다.

김응조 목사님의 가족들은 수년전부터 영암 기념교회 건립 기금을 모으고 있다. 그 정성이 주춧돌이 되어 구성원들의 예배를 회복하는 장소가 마련되길 간절히 바란다. 

4)영암(김응조 목사)님은 참 스승(교역자)이셨다 [고용복 목사 / 신월동교회 원로]
한 사람이 갓난아이로 이 이 땅에 태어나서 참 사람으로 성숙하여 위로부터 나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양육해 주신 부모를 섬길 줄 알며 나아가 사회, 국가, 세계관을 바로 갖고 인류 평화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피를 바치기까지 하여 성취하기 원하시는 하나님나라 건설에 존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참된 스승」을 만나야 함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제가 참된 스승으로 존경하는 김응조 목사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69년 봄 성결교신학교에 입학해서 였습니다. 학업하는 내내 김응조 목사님의 가르침을 저의 심령에 잘 박힌 못이 되었습니다.

저는 매년 「교단 여름 산상성회」때면 새벽예배를 마치고 학교 뒷산에 모신 김응조 목사님과  전영식 목사님 묘소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예성의 아버지 되신 목사님은 빈손으로 오셔서 이렇게 엄청난  성결대학과 1,300여 교회 교단을 이루고 가셨는데 우리는 교회 하나 세우는데도 약한 소리하고 있으니 부끄럽습니다. 용서해주시고 엘리사같이 스승에게 주셨던 은혜와 능력을 갑절이나 내게도 주옵소서” 기도하고 하산 할 때 마다 새 힘을 얻습니다

철거민촌에 신월동교회를 개척하다 지쳐 교훈을 얻고자 찾아뵈었을 때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이 종을 축복하사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손이 되게 하옵소서” 머리에 손 얹고 축복해 주시던 날 결심하였습니다. “목사님 반드시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40년 지나면서 우리 교단에 없던 것을 찾아 있게 시작한 것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단의 영성을 지키려는 부흥사모임과 산상성회요. 둘은 전국 사모회와 수련회이며, 셋은 국내선교회 조직을 통한 교회개척 성장운동입니다. 물론 매년 총회 임원과 전국교회 선후배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더불어 협력해 주셨으니 에벤에셀 여기까지 이룬 줄 믿습니다.

1. 영암 김응조 목사님은 한국교회 초교파적으로 존경받는 영적 스승이십니다. 목사님이 남겨주신 신구약 강해집은 영성 강해로써 유일하게 모든 설교자의 참고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영암 김응조 목사님은 성결이 무엇인지 삶으로 가르쳐주신 가장 자랑스런 예성의 참 아버지 이십니다.

3. 영암 김응조 목사님은 국가가 위기에 있을 때 옥고를 치르시면서 나라 사랑을 가르쳐 주고 가신 신실한 애국자 이십니다.

영암 김응조 목사님 탄생 120주년과 추모 25주년을 맞아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참 스승 앞에 참 제자 되어 살겠노라고 다시 한 번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 예성은 더욱 복되고 자랑스런 교단이 되리라 믿고 감사합니다. 아멘-

정리 / 황성환 목사 
기자 : 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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