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 1926~ )은 신학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열정으로부터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신학은 필연적으로 선교 신학,(Theology of Mission)과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이 된다고 주장했다.
고 은준관 박사(실천신학대학원 초대 총장)는 ‘신학을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섬기는 도구’라며 신학의 의의와 목적을 주창하였는데 이 속에서도 공공신학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복음주의 권에서 주장하는 ‘공적 신학’, ‘공공신학’은 복음주의 내부 진영 안에서는 상대적 진보성을 담보하는 담론이었다면,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공공신학’은 사회참여 신학의 전통에서 다양한 담론으로 이미 논의되었기 때문에, 공공신학이 그렇게 낯선 신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본 논고에서는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그리고 보수주의의 신학적 논쟁보다는 복음적이고 성경적 근거와 입장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공적 신학’ ‘공공신학’에 대한 모방이나 흉내가 아닌 성서적 복음적 이해가 정립될 때 공적교회를 지향하는 목회가 효과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
목회와 신학 이전에 하나님은 위 말씀에서 ‘세상’을 사랑하셨음을 선언하셨는데 필자는 이 성경 말씀을 공적교회의 핵심 근거로 삼고 있다.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자칫 실수하거나 놓치기 쉬운 것이 ‘우리의 이웃인 세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선입견이 간혹 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소극적 의미에서 교회 안이 될 수 있으나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교회 밖인 세상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이 공적교회다.
현대 교회가 표류함은 소극적인 교회인 ‘모이는 교회’에만 시선과 역량이 집중되어 영접과 교육과 친교에 갇혀있는 경우이다. 이제 교회가 눈을 들어 적극적인 교회인 ‘흩어지는 교회’로 나가야 한다. 이 교회가 선교적 교회요, 디아코니아 교회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바로 그 공적교회이다.
나만을 위한 교회, 우리 교회만을 위한 공교회성이 없는 교회가 과연 온전한 교회인가? 이웃을 향하여 열려 있는 교회-이웃을 향하여 먼저 다가가서 찾아 나서는 교회가 될 때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는 빛으로서의 교회, 소금으로서의 교회가 될 것이다.
사도행전의 처음 교회와 한국 초기 교회들은 철저하게 공적교회였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도 공적교회의 사명을 충분히 잘 감당하는 교회들이 많다. 지역사회를 품고 선교와 구제와 복지를 향하여! 어린이 교육과 어르신들을 돌보는 사역, 장애와 아픔이 있는 곳을 돌보는 사역, 생태환경을 보호하고 생명 운동하는 사역 등 수없이 많은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공적교회들이 일어나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장 45절)
주님이 오신 목적은 공적 사역이다. 주님의 섬김은 아가페 사랑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공적교회가 될 때 교회이다. 이 공적 사역은 교회의 자랑과 홍보와 유익을 가져오는 어떤 선한 방법일지라도 그것이 수단이나 방법이 된다면 진정한 공적교회는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을 실천하는 아가페 사랑의 꽃이 되고 열매로 표현해내면서 주님만을 드러낼 때 공적교회가 된다.
현대 교회는 공적교회여야 한다. 미래 교회 마찬가지다. 교회가 공적교회가 되지 못할 때 그 교회는 그 한 세대를 성장하고 부흥했다 할지라도 내 명예와 내 내 성취욕과 나의 유익을 채우는 그 목회자의 1세대 교회가 되고 교회세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의 목회가 아닌 자기 목회에 머무르다 도태하고 마침표를 찍게 된다. 교회가 성직자 주의와 성전주의에 빠져 마치 스스로만 거룩한 척 밖을 살피지 아니하고 드높은 블록을 쌓는다면 이웃이 없는 교회가 되어 쇠락할 것이다. 이런 교회는 다음 교회, 다음 세대를 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공적교회의 좋은 예를 든다면 독일 디아코니아 선구자인 ‘요한 하인리히 비헤른’의 작은 섬김 운동을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은 방에서 한 명의 아이를 돌보는 작은 섬김 운동이 마을과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던 독일교회를 변혁시켜 진정한 종교개혁의 제2막으로 나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 초대교회 이화학당의 시작도 공적 선교의 좋은 실례이다. 한국 사회에서 공적교회의 실질적 예를 들자면 고 한경직 목사 시절의 영락교회를 들 수 있다. 한경직 목사님이 사역할 당시 영락교회는 사회적 빛이 되고 소금이었다. 지금도 한국 땅 어디엔가 이런 교회들이 많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이런 공적교회가 될 때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목소리 높여 외치지 않아도 공적교회의 문턱은 스스로 낮아져서 이방인을 구원하는 방주가 된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여러 방편으로 공적교회를 지향 하나 역량이 부족하여 한계점에 머무르고 있다. 진정한 디아코니아를 이루고자 디아코니아 센터를 건축하여 어린이 교육과 공연장과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고자 했으나 현재 어린이집과 작은 공연장과 공간을 지역사회와 관공서에서 무료로 활용하게 하고 있으나 마을도서관 개관은 청사진이 미루어지고 있다.
목회의 마지막 도전으로 도심 변두리 전원 속에 코이노니아 센터를 건축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위한 채플 실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제3세계 아동을 섬기기 위한 작은 사역과 목회의 마지막과 은퇴 이후 비전을 품고 학문적 연구의 결과물로서 생태환경 위기 극복을 위한 ‘생태교육원’ 설립의 그림을 아직 그리지 못하고 있어 코이노니아 센터 통한 공적교회도 절반의 성과에 머무르고 있다.
아파트 전도와 다음 세대를 위한 학원 선교의 비전을 품고 일찍이 준비했던 에듀커뮤니티 센터는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 속에 비전을 이루지 못한 채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공적교회로 나아감에 있어 필자는 아직 비전의 1/2 정도만 이루고 있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처럼 크게 느껴지고 있다. 여전히 공적 목회가 꿈과 계획만 가지고 한계가 있음을 더욱 깨달아 가고 있다. 반드시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정립이 바로 서야 하고 목회자의 영성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목회자가 동역하는 교회공동체가 그 가치를 이해하고 공유하는 가운데 교회가 바르게 성장해서 기도와 봉사 참여자와 경제적 후원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 교회, 다음 세대를 누구나 외친다. 그 외침으로 우리는 이제 ‘교회 세대’를 이야기해야 한다. 한 세대만 존재하는 교회가 아닌 공적교회로 나아가야 한다. 다음 목회가 이어지는 교회, 다음 성도가 이어지는 교회, 그 교회가 공적교회이다. 이 교회는 완성이 없다. 항상 바르게 성숙하고 성장하고 진행되고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공적교회에도 함정은 있다. 공적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눈을 들어야 함은 자명한 일이지만 교회 안에서 공동체의 영성이 흐려지는 것을 경계하고 근신해야 한다. 즉 모이는 교회가 영성을 잃어버린다면 흩어지는 교회(전도와 선교의 공적교회)는 불가능하다. 영성 없는 공적교회는 사회사업으로 전락하여 주님 없는 사업체 교회가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책망받는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들이여~ 공적교회를 지향하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
이상록 목사 [새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