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국 목사 [늘사랑교회]
부활절을 다시 맞게 되었다. 올해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부활절을 맞이하고 있는가? 그동안 교회는 사순절로 시작되어 고난주간을 지나 부활절에 이르는 절기를 경건을 위해 금욕과 고난 그리고 신앙 부흥을 위한 여러 가지 행사들을 진행해 왔다. 금식, 미디어금식, 십자가 행진, 특별새벽기도, 부활절칸타타 등이 대표적인 행사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사들은 매년 반복되어 진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러한 행사들이 개인의 신앙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은 깊이 새겨볼 일이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은혜로운 부활절을 맞이하고 부활의 증인기 위해 성경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인간군상들을 살펴 보려 한다.
먼저 새벽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다.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 중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뿐 아니라 무덤에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 본 여인들이 있었다. 이 여인들은 주님의 몸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여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았다. 그들은 밝지도 않은 시간에 무덤에 찾아간 열정이 대단한 여인들이었다.
새벽에 일찍 찾아갔기에 주님의 부활하신 현장을 가장 빨리 목격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고 신비한 음성을 들었고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주님이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살아계신 주님을 무덤에서 찾으니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부활을 가장 먼저 확인한 여인들은 죽음으로 끝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생명력을 전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을 수 없는 소망을 선포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를 향하여 가는 두 제자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슬픈 여행자들이 등장한다. 부활의 그 날이 왔는데 그것이 이루어진 줄도 몰랐다. 여전히 어제의 그 날이요, 그들은 무덤에 갇히고 죽음에 매인 자들이다. 자기들의 생각이라는 무덤에 갇힌 상태다.
부활의 기쁨이 아닌 죽음의 슬픔에 사로잡힌 여행자들이었다. 죽음의 슬픔에 사로잡힌 그들은 삶의 현장인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내려갔다. 실망과 두려움에 빠진 채 현실로부터 도망하는 자들이었다. 있어야 할 곳에 못 있고 해야 할 일도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은 낙오자일 수 밖에 없다.
우리도 슬픔에 사로잡힌 채 우리가 열정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현장을 등진 채 절망의 늪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가는 모습은 아닌지?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며 주님이 살아 계시는대도 여전히 절망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우리들이 바로 두 제자의 모습이다. 더디 믿는 자들이 있다고 하셨다.
주님이 지적하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아무리 읽고 묵상해도 또 배우고 배워도 더디 믿는 사람들이 있다. 제자였지만 바르게 믿지 못했다. 말씀하신 대로 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믿지 못했다. 바라고 기대했지만 믿음을 갖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믿음의 시련 때문일 것이다. 그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이 죽었다. 끝난 것 같았다. 부활은 상상도 못했다. 우리들이 가진 지식이 믿음을 가로 막는다. 더디 믿는 것을 주님은 “미련하다”고 하셨다. 내 머리로 이해되는 것만 믿으려는 것이 미련함이다. 옆에 동행하는데도 알아 볼 수 없다.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실은 주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욱이 고난 중에는 더욱 옆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소개를 하실 뿐 아니라 떡을 먹이시면서 보다 확실하게 주님을 알려주셨다.
말씀 듣고 떡을 먹은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눈이 열리고 마음이 뜨거워진 그들은 방향을 전환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절망을 희망으로 채우고 무덤이 아닌 생명으로 바꾼 부활의 살아 있는 증인이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