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훈 목사 [성결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요즈음 교회에서 젊은이들의 수가 급격히 줄고 있고,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앞선 세대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거라는 선입견에 먼저 주눅이 들기도 한다. 유진 피터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 청소년들은 “어른의 보호와, 지적 인도, 그리고 정서적 따스함을 감사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이 자라가며 어른들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지닌 사회적 권력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피터슨의 말대로 오늘의 청년들은 ‘꼰데’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꼰데’의 도움을 간절히 원한다. 다만 권위적이고 계몽적인 태도가 아니라 공통 과업을 위한 파트너임을 인정하는 수평적 관계를 토대로 소통해야 한다. 청년들을 교회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초대하면 좋겠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의 선택이 공동체에 반영되도록 기획부터 실행까지 모든 과정에서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젊은이들과의 소통에서 어른들의 태도는 열정을 자극하는 ‘독려’가 아니라 ‘격려’이다. 이는 그들이 행한 것에 생생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결과물에 대한 평가와 충고에 지쳐있다. 하지만 결과물에 대한 자기 확신도 약하다.
사소한 것에도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인간의 문화적 사명이다(창 2:19). 추상적이고 관습적인 칭찬이 아니라 ‘사실’(fact)에 근거한 구체적 격려와 의미 부여에서 청년들은 효능감과 자존감을 느낀다. 그것이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도움이다.
드라마 <미생>과 <나의 아저씨>에서 어려운 환경을 견디며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주인공이 좋은 어른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는 청년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다. 이 드라마에서 어른들은 미숙한 청년을 가르치려 강요하지 않고 사생활에도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지켜볼 뿐이다.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는 오랜 경험의 품격을 보이며 그들을 바르게 이끌어 준다. 청년들은 그런 어른의 경륜을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내공)라는 수식어로 ‘리스펙트’한다. 기성세대가 지닌 경륜에서 진정한 권위가 생성된다.
열심히 살았던 앞선 세대 지도자들이 만든 교계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다.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변화의 필요를 요청한다. 그 새로운 변화는 결국 새로운 세대가 주도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모험을 떠난 것을 주목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또 다른 결단은 아들을 하나님 명령에 기꺼이 내어준 것이다.
이스마엘을 떠나보냈고, 이삭을 제물로 드렸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다음 세대에 대한 염려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그들이 만들어 갈 새로운 교회를 기대하며 자립하게 하는 아브라함의 용기가 필요하다.
교회가 다음 세대를 세운다는 것은 그 주체인 청년들이 만들어 갈 새로운 교회에 대한 기대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전 세대와 다른 방식과 모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 부분에 앞선 세대는 낯설고 당황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현 기독교계 상황에서 이런 변화는 새로운 활력의 동인이 될 수 있다. 청년들의 교회 이탈은 교회에 대한 실망과 싫증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더 나은 교회’를 찾기 위한 주체적이며 ‘긍정적인’ 이유도 있다. 그들이 만들어 갈 새로운 교회가 오늘날 사회적으로 혼란과 고통을 겪는 동시대 청년들을 품을 것이다.
청년들에게 얻는 도전과 영감은 앞선 세대들도 자신들의 새로운 문화 창조를 위한 선물이다. 그저 청년들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앞선 세대들이 안정주의 타성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지난날 청년 정신을 깨워 자신들의 취향과 소명에 따른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앞선 세대의 새로운 도전은 분명 청년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된다. 이렇게 ‘청년 정신’은 세대를 연결하는 끈이 되며 황폐해진 기독 문화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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