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하계수련회 지상강의-3
제12회 목회자하계수련회가 8월 17~19일까지 문경시 소재 STX리조트에서 열렸다. 총 5번의 특강이 있었으며, 저녁시간에는 목회자 부흥회가 있었다. 그중 5번의 특강을 지상강의의 지면에 옮겨본다. 지면관계상 전문을 다 실을 수는 없으나, 참석하지 못한 목회자들에게는 새로운 도전과 교훈을, 이미 참석한 목회자들에게는 강의의 감동을 되새기는 특집이 되길 기대한다. 이 지면에는 강의 자료를 축약해 실었다.
[편집자 주]
오현철 교수 [성결대학교]
많은 학자들이 설교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크게는 두 종류로 나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설교는 ‘선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선포’라는 것이 가장 큰 전제이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붙든 자로 대언자라고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또 한 축은 만약에 설교가 선포면 우리가 할 일이 별로 없죠, 제어파스라는 사람은 설교자는 무색무취해서 하나님의 것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야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선교가 선포라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또 한축은 설교는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이해한다면 또 다른 요구들이 요청됩니다. 설교자는 성경본문을 먼저 만나고 회중을 만납니다. 우리가 여기서 싸움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첫 번째 싸움은 설교자인 저나 여러분이 성경본문과 맞닥뜨리는 싸움입니다. 이게 왜 싸움이냐면 설교한 게 20년 30년 넘어가면 쉬운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목회자로 부름 받고 늘 본문과 씨름하고 기도생활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갈 여지가 많기 때문에 성경의 지평과 맞닥뜨릴 때 설교본문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는 가치관과 생각과 판단을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참하게 패배한 설교자가 나 자신을 무너뜨린 말씀을 들고 두 번째 격전지인 예배실로 들어가서 청중들과 두 번 째 싸움을 시작합니다. 나를 무너뜨린 말씀이 나를 통과해서 그들에게 흘러가서 그들에게도 역사하도록 대화와 소통이 하나님으로 부터 모든 이에게 전달되어지도록 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는 커뮤니케이션 이상입니다, 그것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합니다. 설교 가운데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설교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실행하는 것은 설교가 본래 목적하는 영적인 것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설교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연구가 불필요하다거나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를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으로 평가하여 성패를 말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거나 거절해서도 안 됩니다. 설교의 위기가 곧 커뮤니케이션의 위기가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닙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설교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봉사하는 자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 설교자의 정체성과 성령의 역할
설교자는 누구인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성령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설교자는 어디서부터 올까요? 설교자는 회중으로부터 옵니다. 물리적으로 만이 아니라 회중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를 경험한 설교자는 다시 회중 앞에 세워집니다. 이 단계에서 세워지는 설교자는 말씀을 통과한 설교자로서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들고 있는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를 세상으로 가게 합니다, 파송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말씀의 공동체가 세상으로 파송되는 것입니다.
그들만 보내고 우리만 교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갑니다. 우리도 회중들과 함께 회중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순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순환되는 일들을 우리에게만 맡겨주시면 우리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일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영과의 사역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늘 절망 속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이러한 순환과정을 우리만 하게 하지 않으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계십니다. 이 사이 사이에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배자와 다를 바 없었던 우리를 말씀의 종으로 세우시는 단계에서 성령은 ‘calling’ 즉 부르심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부르신 우리가 말씀 속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의 지식으로 성경을 볼 때 어떤 부분은 잘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만 혼자 두지 않으시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조명을 하십니다. 그 말씀을 찾아내고 성도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전하고 그들과 함께 말씀의 공동체가 돼서 세상으로 나갈 때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해 주시는 일은 기름 부으심입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소통은, 전달은 우리에게 맡게 주셔도 성령께서 도우심으로 때마다 사건마다 도와 주셔서 그 일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일이 설교와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켈빈 밀러는 회중 앞에서의 첫 3분이 회중이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성령께서 회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도록 성령에 의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권성수는 처음부터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권위 있게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대상과 그들이 처한 환경을 알고 그 기초위에 설교한 탁월한 커뮤니케이터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바울을 근거로 그렇게 전하는 것만이 바울의 선택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권성수의 의견을 같이하는 부분은 이 시대가 영적인 쓰나미 즉 영적인 것에 대한 전에 없던 관심을 가져오는 시대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를 통해 하늘의 것, 영적인 것, 성령의 것을 전하는 것은 언제나 유익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설교자가 아니라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해야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회중 개개인 가운데서 일하십니다.
설교자인 우리의 역할은 그가 일하시도록 공간을 남겨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와 성령에 대한 논의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 잘못된 언어습관을 바로잡고 구어체나 보이는 언어로 설교하고 대화하듯 말하기라든가 쉽고 이해하기 좋고 기억하기 쉬우며 아름다운 표현을 인격에 담아 전달하는 노력 등을 불필요한 것으로 내어 버리도록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유기적으로 합일된 설교자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것 이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