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4 (일요일)
총회/기관 지방회 화제&인물 특집 선교&신앙 목회&교육 열린광장 오피니언 교계&문화  
전체보기
인터뷰
교회탐방
성결카툰
설교
영어로읽는성경
성결일화
부흥하는성결교회
아깝다학원비
 
 
뉴스 홈 연재 교회탐방 기사목록
 
경북지방회 돌단교회 / 최종화 목사
빈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2016-05-06 오후 3:10:00    성결신문 기자   



1. 창립배경
구원의 날을 준비하며, 구원받을 자를 찾아 다니셨던 예수님과 사도요한 그리고 이사야 그분들은 광야 빈들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감당하고 그 사역을 완성하셨다. 내게 사명으로 예수님이 다가온 것은 고 2때 여름성경학교 교사와 지역봉사로 일꾼 없는 교회를 섬기면서 이다. 작은 교회에 일꾼이 없어서 힘들어 하시는 교역자를 보고 교회에 보탬이 되고자 하여 결심하고 다니던 교회를 떠나 작은 교회로 옮겨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 후 1년 교회에 성도가 없어서, 교역자분이 힘들어서 다른 사역지로 가게 되었고, 거기에 남은 사람은 형제, 자매들 몇 명과 아동부 20여명뿐이었다. 하지만 교회를 맡아 섬길 후임교역자는 안 오시고 형제, 자매들은 뿔뿔이 떠나가고 아동부 학생들을 가르치던 나는 상위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도 대답은 없고 건물 주인은 후임 교역자가 와야 문을 열어 준다하여 힘이 없는 학생인 나로서는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어 이웃교회에 아동부 학생들을 인도하고, 다시 상위기관에 찾아가 1년만 기다려주면 내가 신학교가서 오겠노라고 하고 다시 모 교회로 와서 신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성결대 신학과에 들어와 공부를 하였고 내게 주신 사명을 잃어버리고, 다른 곳에서 사명을 이행하려는 나에게 길을 열어주시지 않으셨고, 방황하고 어려움 가운데로 몰아가시던 중 두 번 째 사명을 다시 고취하게 하시어 진주에 있는 진주동부교회 부교역자로 부임하게 되어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 때에 서부경남 선교동지회라는 선교단체를 알게 되었는데 그 단체는 ‘가까운 마을들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교회 없는 지역에 주말 사역으로 노천교회학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광야와 빈들과 같은 교회가 없는 지역을 보게 되었고, 함께 사역하기를 원해서 진주동부교회를 사임하고 교회가 없는 지역이었던 이곳 경남 하동군 진교면 술상리에 노천교회학교를 하는 대학생 사역자들과 함께 1년을 같이 사역하면서 결단을 하여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곳은 바다가 있는 마을이고, 우상숭배와 문중제각들이 있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전부였고 아이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여 토요일마다 노천주일학교로 쌀 창고를 빌려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1992년 가을에 이 마을을 방문하고 그들과 함께 사역을 시작하였고, 1993년 4월에 이 곳에서 정착하려고 준비하며 기도하고 있던 중 “일단 들어가서 시작하자”라는 마음과 말씀을 주셨다.(“창세기 28장 10~22절의 말씀대로 어느 곳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서기 원하며, 열왕기상 18장 30~40절의 말씀대로 불모지 같은 땅, 대적의 땅에 하나님의 제단을 쌓으리라.” ). 그리고 마음에 교회의 이름을 돌단교회로 지어야겠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동네 이름을 함께 붙이면 교회이름이 우스워진다는 것이다. 동네 이름을 빼고 하자 생각을 하고 술상이 변하여 예배의 상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1993년 6월 영남지방회와 진주동부교회의 도움으로 이 땅에 들어와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160세대 5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고, 그 중 주일 학교 학생이 70여명, 중·고등학생이 50여명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희망을 보게 하셨고, 사역하도록 힘과 용기를 주셨다.  

총각의 몸으로 사역하는 것에 대한 어른들의 염려와 부담감으로 인해 기도를 하게 되었고 응답으로 현지 면소재지 교회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의 가정에서 준비된 자매를 이웃 전도사님에게서 소개를 받고 1994년도에 결혼을 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해서 그해 6월에 창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2. 교회사역
이곳에서 본격적인 사역을 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부딪히면서, 나름 짜임새 있는 사역들을 주변의 도움으로 시작 하였다. 여기서 처음 사역은 노천학교, 침술봉사, 여름성경학교, 겨울성경학교, 마을 전도, 그리고 아이들 공부방 등을 하면서 그때그때 사역의 지혜를 주셔서, 65세 이상 어르신들 목욕, 마을 전도 잔치, 초상집 찾아가 위로하기, 장날 전도 등으로 사역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고, 복음의 문도 서서히 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을 이장으로 부터 교회 부지를 소개 받고 1997년에 383평을 매입하게 되었고, 바로 지을 수 없어서 2년간 교회부지에 농사를 짓고 농민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면과 군으로 부터 종교부지는 안되고 농사용도의 창고와 주택으로 허가가 되어 1999년도 8월에 창고를 교회 40평과 사택 25평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2000년도 1월에 입주하고 2001년도에 입당예배를 드렸다.

2003년에 성도들과 학생들이 늘어가면서 식사할 장소가 비좁아서 교육관 겸 식당으로 사용할 장소를 뒤의 텃밭으로 사용하던 30여 평 정도의 땅에 주방과 기둥에 지붕만 얹어서 사용하다가 추위와 싸워야 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벽을 쌓아주시려고 서울에서 일꾼을 데리고 둘째 매형이 오셔서 “종화의 하나님이 나를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게 하였다”면서 벽체공사와 실내공사비를 주시고 가셔서,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웃교회 집사님들과 성도들과 함께 마무리를 하였다. 지금도 그곳은 아주 유용하게 성도들과 마을 주민들을 위하여 사용되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역의 아픔이 시작 되었다. 아이들은 장성하면 교회의 일꾼이 되겠구나하여 찬양사역자로 교사로 직분자로 가르치고 세우려고 하였지만, 상급학교를 위해 이곳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가고, 젊은이들은 농사에 소득과 재미가 없다면서 직장을 찾아 그들 또한 하나 둘 떠나갔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자 하여 하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피아노 플룻 기타 드럼 바이올린 첼로 등으로 1인 2악기를 하게하여 예배를 섬기는 찬양 사역자로 세워 나갔다. 

역시 나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이 곳을 떠나야할 시기가 오겠구나 하는 마음과 일꾼을 세울 수 없구나 하는 마음에 절망감이 들어왔다. 희망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또 하나의 몸부림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나의 아이들이 장성하여 교회를 떠나지 않고 토요일이면 아버지가 섬기는 교회에 돌어와서 찬양사역자로 또는 교사로 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도와주고 있어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3. 예손복지센터 개원 
앞으로 향후 10~20년 농촌교회는 어떻게 될까? 젊은이들은 없고, 노인들만 남고, 나도 여기서 사역을 마치면 누가 와서 농촌사역을 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지고 답답해진다. 유럽교회와 미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올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 하나님께 죄송스럽고 답답한 마음뿐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에 허전한 마음이 사역의 아픔이었다.

20여년의 사역 속에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게 하시고 사역을 품게 하시면서 나에게는 석, 박사 과정을, 아내에게는 사회복지 대학과 상담심리학 대학원을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고, 시간과 환경과 싸우면서 마치게 하셨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사역을 하나님은 여시고자 훈련을 시키시고 준비하게 하셔서 마칠 때 쯤에서 어르신들을 섬기는 사역을 보게 하시고 마침 정부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제도 속에서 어르신들을 섬기면서 복음을 전하며 사역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2008년부터 재가복지 센터를 설립하여 교회의 부설로 ‘예손복지센타’를 개원하였다. 어르신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주는 일에 많은 보람이 있지만 늘 돌아서 나올 때면 그들의 눈에는 조금 더 있다가 갔으면 하는 마음의 눈길을 주시곤 할 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마음이 아플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다는 생각에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또 하나의 사역을 준비하게 하신 것이 어르신들을 센터로 모시고와서 식사와 삶의 활력소를 찾을 수 있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 주간보호시설을 열게 하시었다.

없는 돈에 건물을 지으려니 몸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이 생겨났다. 돈이 있으면 짧은 시간에 고생하지 않고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 1년의 시간동안 일과 재정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갔지만 완공을 하고 개원예배를 드리고, 어르신들이 와서 하루를 무료하지 않고 외로워하지 않고 서로 동무가 되고 도와주면서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시작되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길 잘 했구나 하는 마음에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구나’라는 감사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숙제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해택을 받지 못하는 어르신들이다. 이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며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이웃교회에서 노인대학을 하는 것을 보았다. “섬기는 사역이기에 감사가 나오고 복음을 전하는 길이기에 사명으로 알고 한다”는 그분들의 말씀에 용기를 가져본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섬기는 일이라면 교회가 감당하면서 나가자, 힘을 모아 다시 한 번 일어서자, 그리고 광야의 소리를 울리자, 주님오시는 날까지... 내가 주님 만나는 날까지... 그리고 교인들에게 함께 사역할 것을 직원회의 때 내어 놓고, 흔쾌히 허락을 받고 준비하기로 하였다. 

4. 도시와 농촌의 연계 사역
농어촌에서 사역의 어려운 점이라 면 ‘재정, 일꾼, 지속성’으로 여겨진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실망과 자멸감에 빠지기 쉽다. 왜냐하면 도시처럼 재정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점점 노령화된 사회에서 재정의 자립은 꿈같은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사역지를 버리고 떠나가면 이곳은 다시 광야가 된다. 그래서 국가에서 하는 제도를 이용하여 보았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제도로 재가복지센터와 주야간보호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섬기면서 필요재정을 채워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소외된 노인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복음으로 다가 가는 일중의 하나로 노인대학개설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은 일꾼과 재정이 필요한 사역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할 사역이다. 그래서 일꾼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주변교회와의 연합이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이웃 목회자들과 함께하고 도시에 있는 큰 교회들의 재능 있는 성도들의 자원봉사가 필요하다. 

그러면 이제 지속성이다. 농어촌 목회자들이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의 연합이며, 자원교류이다. 농어촌이 없다면 도시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도시가 있으려면 농어촌의 자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농어촌이 살아야 도시도 살 수 있다. 모든 자원이 농어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기자 : 성결신문
관련기사
 
 

 
네티즌 의견
전체 0   아이디 작성일
 
의견쓰기
 
경기남지방회 오산교회 / 진상만 목사
필리핀지방회 일로일로 오진한 선교사
교회탐방 기사목록 보기
 
  연재 주요기사
일본의 또 하나의 불길 교또 선..
학원이 만든 실력은 고교 때 안 ..
대관령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고..
홍천 풍성한교회 김국현 목사
해비타트 운동 통해 이웃사랑 실..
일곱 기둥 위에 건강한 교회 세..
처음도 나중도 영혼 구원하여 제..
건강한 교회 신나는 성도-부여성..
 
 
가장 많이 본 뉴스
  사 설
회사소개 광고안내 이용약관 개인보호취급방침 이메일수집거부


[110-091]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29ㅣ대표전화 : 02-732-1286ㅣ 팩스 : 02-732-1285 ㅣ등록번호: 문화 다 06518
발행인: 김원교 ㅣ사장: 이철구ㅣ편집인: 이강춘
Copyright ⓒ 2009 SKNEWS. All rights reserved. Contact: news@sknews.org